희롱의 십자가

마27:27-44에는 세 종류의 희롱이 나온다.

첫째, 군병들의 희롱. 총독의 군대들이 모여 주님이 입으신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고 가시관을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오른 손에 들린 후 무릎을 꿇고 왕의 평강을 빌면서 신하 흉내를 내면서 체형을 행하는 그들의 조롱은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가소로운 마귀의 희롱이다. 온갖 불의와 거짓과 공갈이 총망라한 조롱이었다. 일찍이 세례요한이 군인에 대해 관찰하여 했던 경고처럼 사람에게서의 강탈, 거짓으로 고발하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 모르는 탐욕으로 그들은 그리스도를 조롱했다.

희롱하는 마귀의 목적은 그리스도에게 고통을 주려는 것보다 더 교묘한 목적이 있었다. 참을 수 없는 희롱 속에서 자기의 힘으로 능력을 나타내려는 올무에 빠지게 하려는데 있었다. 내게 절하면 천하를 네게 주리라는 유대 광야의 시험이 재현된 것이다. 세상은 정사와 권세가 마귀의 손아래서 움직이는 일이 많다. 세상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온갖 조롱을 당할 때마다 참으면서 그들을 그리스도의 군병으로 만들 책임이 있다. 이 좁은 길을 갔던 그리스도의 참으심으로 먼 날 마귀의 아지트인 로마는 망하였고 그리스도의 국가로 변화되었다. 그 일로 복음은 온 세계로 확산되었다. 조롱의 십자가를 질 줄 아는 공동체가 악한 문화를 개혁시킬 수 있다.

둘째, 행인들과 장로들의 조롱(39,41) 십자가에 매달린 주님을 향해 지나가던 행인들은 성전을 사흘에 짓는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내려오라고 조롱했고 서기관과 대제사장들은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소리쳤다. 이것은 최대의 수치와 조롱의 십자가였다. 좁은 길을 가는 자기 백성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다. 기독교는 야바위꾼처럼 내기나 하고 경쟁을 부추 키는 종교가 아니다. 침묵함으로 책임지는 종교이다. 주를 위해 수치와 창피와 수모 당함을 기뻐하는 이유는 상이 크기 때문이다. 주를 위해 손해 보는 삶에 하늘의 능력이 나타난다.

셋째, 강도들의 조롱. 이 조롱은 십자가상에서 또 나타났다.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고 했다. 같은 극한 상황에 떨어질 때 같은 입장을 이해하여 친한 동료가 되는 경우가 많다. 사형수로 같은 동료인데도 그들은 주님을 대적하며 조롱했다. 성부는 최소한의 자비마저 거두어 가셨다. 그래야만 자기 백성의 최소한의 죄와 죄책감과 지옥 형벌이 모두 제거되기 때문이다. 과부의 사정은 과부가 안다는 말이 여기서는 통하지 않는다. 장로들의 조롱에 동참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조롱하는 것은 마귀의 상투적인 수법으로 뇌관을 건드리는 것과 같다. 하나님만 신뢰하는 그 한 줄기의 끈을 스스로 끊으라고 유혹하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는 마귀의 시험을 각오하고 수치를 감수해야만 한다. 조롱당함의 시험을 통과할 때 왕의 능력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십자가 실형이 당해지는 자리에서도 주님은 심적 고통을 크게 당하셨으나 주님은 침묵으로 그 조롱을 기쁘게 받으셨다. 그 일로 구속이 완성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