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고난 (2)

시련과 유혹에 어울려진 욥의 고난은 그의 세 친구가 방문하기까지 여러 달이 지났다.(7:3) 동방의 갑부이며 경건의 사람으로 평판 받던 그가 하루아침에 추락된 상태는 비참함 그 자체였다. 끙끙대며 앓는 신음소리는 물이 흐르는 것 같았고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매우 가려운 기와 조각으로 긁어대며 불면에 시달리며 매일 연속되는 낮과 밤이 속히 지나기를 바라는 곤고한 그에게 친구들이 찾아왔다. 그의 고통에 침묵으로 동참하던 그들이 입을 열어 한 최선의 권면은 욥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도리어 큰 짐을 안겨주었다. 아내, 친구 그리고 도움받던 이웃들의 말은 그가 당한 고난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쏘아대는 빗나간 화살에 불과했다.

특히 세 차례에 걸친 욥의 세 친구의 영적 위로의 모양으로 가장한 사탄의 교묘한 유혹은 참기 어려운 또 다른 시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어떻게 그 고난을 극복했는가? 친구와 변론 내용을 자세히 읽을 때 우리는 욥의 고난을 좀 더 이해하게 된다.

첫째, 그에게 떨어진 급작스러운 충격을 그는 주권 신앙으로 이겼다. 재산과 자녀가 한 날에 모두 날아간 소식을 들은 그는 하나님만이 주인 되심을 확실히 붙들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시오니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라는 고백 속애서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의 정점인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음성을 듣는다. 모든 일에 주인 되신 주재권 인정이 환난 날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모든 일이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확신으로 현실의 극박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원망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감사할 수가 있었다. 시험의 정답을 몰랐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주인되심과 자신의 종됨을 인정하고 즉시 그 안에 숨었던 것이다. 오늘날 신자의 환난은 주권신앙으로 이긴다. 이것은 주님의 이름을 부를 뿐 아니라 그의 마음에 겸손의 심령을 지키는 것을 가리킨다. 성령이 주시는 마음만이 그 상태를 지속시킬 수 있다.

둘째, 그는 고통의 이유를 알지 못해 자기 생일을 저주하는 자리에 떨어졌다. 4장에 나온 그의 고백에 보면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갈등이 대단했다. 이것은 가롯유다 처럼 신세를 한탄하여 목 매달아 죽으려는 것이라기보다 차라리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하는 엘리야 심정인 것 같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고난의 밤은 견디기 어려운 순간이다. 그리고 계속되는 고난은 참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감당할 시험과 피할 길을 주신 증거를 나타내셨다. 연속된 급보의 불안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여유가 조금이라도 생겼기 때문이다.

셋째. 그는 고독을 강하게 느꼈다. 5장에 보이는 표현은 그의 외로움을 생각하게 한다. 히스기야가 최후통첩을 받고 하나님을 향해 나는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둘기같이 슬피우는 심적 고독으로 우울증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이다. 예수님도 겟세마네동산에서 십자가의 쓴 잔을 생각하고 심히 고민하여 죽을 것 같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욥의 고난은 그리스도 고난의 그림자였다.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주권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간 것은 처음 태도에 비하면 조금 변질되었지만 아주 넘어지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감당할 시험만을 주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