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교회의 바알우상

열왕기상 18장에 나온 엘리야가 거짓 선지자들과의 대결은 세상에 있는 교회의 승리를 잘 보여준다. 이스라엘 전국에서 모은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 400명의 규모는 아합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그 땅을 우상숭배로 더럽혔는가를 보인다. 유다 왕가와의 정략결혼(대하18:1), 모압을 굴복시킴(왕하3:4-5) 그리고 큰 나라, 아람의 벤하닷을 격퇴한 전훈(왕상20:13-34)만 보더라도 아합의 정치 수완은 대단했다. 그러나 여호와 경외 신앙을 상실한 그는 자기 만을 아는 이기주의, 나봇의 포도원을 자기의 나물밭으로 만들기 위해 피를 흘리며 뺏는 탐욕주의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오르내리는 변태적 인격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갈멜산의 대결로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심을 천하에 드러낸 일은 현대 교회에게 교훈을 가르치는 한 그림계시이다. 어떤 싸움이며, 어떻게 이기며, 어떤 결과가 일어났는가?

첫째, 번영 신과의 대결이다. 바알과 아세라는 고대근동에 통용된 농경사회의 번성을 내려주는 우상이다. 적절한 기후로 농작물의 대풍을 기대하는 그들의 바램이 표현 된 인간 탐욕의 상징이다. 여로보암의 우상정치로 백성들의 마음은 수년간의 징계에도 불구하고 회개보다 중간상태 속에 떨어져 만성화 되어버렸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명이 있다할지라도 대다수가 영적 침체에 기울어져 있을 때였다. 이 도전은 마치 현대 교회가 물량과 번성을 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현대판 바알이 교회 밖에 보다 교회내의 신자의 마음을 뒤덮어 불순물이 잔뜩 낀 삶을 영위한다. 그러므로 엘리야처럼 신자들은 번영으로 가장한 마귀와의 대결을 위하여 갈멜산으로 나가야만 한다. 가나안의 젖과 꿀이냐, 육이냐 영이냐, 육체의 소욕이냐 영의 소욕이냐의 대결구도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둘째, 참 예배자가 이긴다. 엘리야는 사자 같은 담력으로 아합 앞 도전장을 던진다. 마치 모세가 바로 앞에 나가 “내 백성을 보내라”고 요청한 것과 같다. 그 때 엘리야는 두 제단 위에 놓인 송아지 제물을 불로 사르는 신이 참 하나님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먼저 바알 편이 시작되었다. 제단 위에 송아지를 놓고 바알이여, 바알이여 불을내려 달라고 부르짖으며 자학 행위을 하면서 까지 자기 심혈을 쏟았으나 아무 응답이 없었다. 왜냐? 바알은 신이 아니라 그들의 탐욕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허무였다. 정성을 쏟았다 할지라도 참 예배의 열매가 나타날 수가 없었다. 인간의 자율주의의 정성과 헌신은 아무리 화려해도 그 마지막은 허무이다.

그러나 엘리야 제단은 달랐다. 먼저, 구약 교회를 상징하는 열두 돌로 제단을 수축하고 나무를 놓고 주변에 3.2 리터 분량을 넣는 크기의 도랑을 파고 물 12통(택한 수)을 부었다. 그리고 그 위에 그리스도와 교회를 상징하는 송아지를 올려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내가 하나님의 종 됨과 하나님이 살아계심과 내가 하나님이 뜻대로 지금 행하는 것임을 불로 응답해 달라고 부르짖자, 인격적 하나님은 불로 응답하셨다. 참 예배는 언제나 신령과 진리로 드려지는 것이다. 모든 제물을 태운 기이한 현상도중요하지만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심이 알려져 하나님의 백성 속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마음의 변화는 참 예배자 위에 임하는 열매이다. 현대교회는 참예배의 성공자가 되는 것에 초점을 맞출 때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