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된 책을 읽으면 그대 생애를 허비할지도 모른다.
1521년 후, 유럽은 마틴 루터의 책을 읽는 사람을 정죄했다. 그 해, 루터는 웜스에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제출했다. 교회는 그의 문서를 금지시키기 위해 유명한 웜스의 금서로 지정했다. 그러나 마틴 루터가 어거스틴 계열의 사제였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규례에 따라 폭넓게 용납되었다. 앤트웝의 어거스틴파들은 루터가 가르친대로 복음서를 열정적으로 읽고 설교했다.
그러나 앤트웝은 루터의 법적 사상을 듣고 반응하기 위하여 신학박사들이 루우벤 대학에 모이기에 가까이 있었다. 1522년, 전체 규정을 따라 불치의 위법으로 정한 건물인 것처럼(이 경우, 그들이 영적 불치의 위법 행위로 생각한 것처럼) 그들은 체포당하고 행동의 제제를 받았다. 제임스 로스트는 결국 수사망을 피했고 그의 조수 맬콰이어 미리쉬는 조서를 철회하도록 강요되었다. 다른 이들 가운데 세 사람의 어거스틴 파 사제들은 자기들의 마음과 양심에 굳게 서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들이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교황권, 성찬의 본질 그리고 교회의 다른 규정들을 거절함으로서 최초로 죽임을 당했다. 헨리 보스, 요한 어크는 1523년 7월 1일에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죽임을 당했다. 램퍼트스는 그의 철회를 생각할 시간을 요청했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의 분명한 믿음 때문에 결국 죽임을 당했다. 그 사제들의 시련은 특이한 것이었다. 이 기소에 관한 책임이 정치와 결탁되었고 신학과 교리문제와 더욱 결부되었다. 박해자들은 동의하는 말 한마디로 용서하기로 하고 믿음의 복귀를 재촉했다. 마틴 루터가 그들을 잘못 인도했다고 말하자, 헨리 보스는 “우리가 잘못 인도되었다면 사도가 그리스도에게 잘못 가르침 받은 것과 같다.”고 대답했고 박해자들이 “교황의 교지를 파기함에 두려움이 없느냐?”고 하자 그들은 “우리는 구원하고 정죄하는 하나님의 계명을 믿는 것이지 인간의 규례를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 응답은 마른 건초더미에 불을 붙이는 것 같았고 결국 그는 죽임을 당했다. 마틴 루터 자신은 그들의 공적 처참한 참형 소식을 듣고 슬픔에 잠겼고 “우리가 대항하는 것은 단순한 게임이 아니다. 그것은 피를 구하는 것이고 생명을 요구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 때 루터는 그리스도를 위한 부르셀에서 죽임당한 두 순교자와 소피스트들에 의해 화형당한 루우벤의 한 순교자를 위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옛 원수가 그들을 붙잡아 위협하고 그들을 꼬여 속이면서 하나님 말씀을 부인하라는 시험을 했다. 그 목적을 위해 박해자들은 루우벤의 수많은 소피스트들을 불러 모았도다. 박해자들이 온갖 계교로 공격할 때 마치 성령이 바보처럼 보여졌을지라도 그들을 결코 이길 수 없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