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러스 레이머스(Petrus Ramus 1515-1572)

피터 레이머스가 위험한 길에 처할 수 밖에 없는 세가지 적극적 까닭이 있었다. 첫째, 그는 지성인이었다. 죤 칼빈의 출생지와 가까운 프랑스 피카디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출생한 레이머스는 소년시절에 아버지를 잃었다. 정말 그는 거대한 사회적 기만을 극복하면서 그것을 보상하기 위하여 군인으로, 하인으로 그리고 논리학과 수사학의 석사학위를 얻은 학생으로서 섬겼다.

둘째, 레이머스는 창조적이었다. 그의 연구는 그의 머리를 다른 사람들 곧, 선생이나 혹은 집필자들, 거룩한 사람 혹은 비천한 사람들에게 얻은 배움으로만 채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레이머스는 숨겨진 비밀과 알려지지 않은 관계 그리고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정리하는 실마리를 찾는 일에 지성적 재주를 활용하는데 큰 관심을 가졌다. 예를 들면 토마스 아퀴나스이래 교회를 반대하는 고대 헬라철학자 아르스토텔레스는 레이머스의 그물을 그대로 통과할 수 없었다. 바로 이 특징이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셋째, 레이머스는 수다스러웠다. 그는 논쟁을 좋아했다. 그는 그 즈음에 프랑스의 흐름과 전혀 다른 책을 발행했다. 50권 이상 그리고 자기 생각을 발전시킨 다양한 편집으로 이루어진 어떤 책을 출판했다. 유럽의 아무도 레이머스가 생각하는 바를 놀라운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말과 책이 미칠 수 있는 곳에서 자기 말하기를 좋아했다.

다른 두 사건이 레이머스를 고난의 생애로 규정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짧은 생애를 살았다. 레이머스는 1560년에 완전히 그의 기민한 정신이 끄는 개신교로 돌이켰다. 그는 개혁교회의 프랑스교회 위그노 파가 되었다. 그 일로 인해 그는 자기의 가르치는 일에 도움을 준 로레인 추기경의 지원을 잃게 되었다. 결국 그는 파리와 대학을 떠나도록 강요를 받았고 스위스와 독일에서 수년을 보내면서 그 나라에 퍼져있는 개혁적 루터신학의 식탁을 즐기게 되었다.

루터와 칼빈과 같은 위치에 오른 레이머스를 이끈 이 모든 일들은 그가 탁월한 마지막 공헌을 세우게 했다. 레이머스가 그의 모든 충동에 반대하는 침묵을 발견했을 때 그는 단지 은밀하고 우스꽝스러운 어떤 바보의 심부름이라 생각했었다. 1570년 그가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에게 강의가 허락되지 않았고 그의 집필과 교육을 받은 대중에게 매력적일 수 없었다. “나는 한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 보다 학문있는 신학자가 전한 복음을 자녀들에게 가르치겠다.”는 그의 말이 교수들과 다른 철학자들을 화나게 했다. 그 도시에 한 위그노가 있는 것은 그에게 위험한 시기였다.

1572년 8월 24일에 학살의 파도가 챨스 9세가 왕이 되는 정치적 도구가 되었다. 이것에 대해 성 바돌로매오 날, 저녁에 대학살의 유혈사태가 프랑스 전역에 폭발했다. 결과적으로 수천의 개신교도들이 학살을 당했다. 찰스는 레이머스를 살려두라 했으나 파리의 군중을 아무도 통제할 수가 없었다. 레이머스는 프레슬스 대학 자기 연구실에서 붙잡혔다. 그는 죽임을 당했고 그의 시신은 절단되고 목이 잘려 세이네 강 속에 던져졌다. 레이머스가 덜 지성적이고, 자기 확신을 덜 따르고 적게 말했더라면 균열이 덜했을 것이고 좀 더 위험하지 않은 크리스챤이 되었을 것이다. 장수의 생애를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더 악한 종말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적절한 공간과 시간에 주어진 레이머스는 고난에도 자석과 같았고 순교자의 면류관을 쓰는데도 자석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