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프리안 (Cyprian AD 200-258)

교회는 나뉘어져 분쟁이 일어났다. 칼타고 신자들은 발레니우스 황제의 박해를 강하게 대항했다. 그러나 모두는 아니었다. 어떤 이는 동굴에 들어가 로마 여신에게 드리는 제사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맹세를 포기했다. 발레니우스가 죽어 박해가 끝났다는 사실로 겁쟁이들과 타협자들이 어떻게 교회에 재임명되겠는가? 키프리안 감독은 화해와 성장으로 교회를 이끌었다. 그 자신이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감금된 사실로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 키프리안은 회복된 후 도덕적 명성을 그대로 가졌는가?

키프리안 초기 생애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가 부유한 그리스도인의 가정에 태어났다. 칼타고에서 존경을 받은 그가 40세에 회심했지만 그의 출생 이야기는 역사적 기록이 없다. 그러나 그의 새 생활에 관한 증거는 알려진다. 키프리안은 가난과 독신의 맹세를 그대로 지켰다. 그는 성경적 믿음 성장에 방해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성경 외에 세속적 책을 읽는 것을 포기했다. 그가 신자들의 존경을 받아 회심 후 2년 만에 248년경 칼타고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그 때는 감독직 수행하기에 매우 위험한 시기였다.

249년에 데시우스가 로마 황제가 되었는데 외적으로 북쪽 고트족이 위협했고 내적으로 죽음의 위협을 당했다. 데시우스에 대한 새로운 충성 운동이 크리스챤 그룹 지도자들을 겨냥했다. 그는 모든 사람이 로마 신 앞에서 자유롭게 제사 음식을 먹게 했다. 로마당국자들은 박해에서 벗어날 수 있는 티켙, 리벨루스(libellus)를 발부하여 우상에게 절하게 했다.

2년간 데시우스 박해 시, 많은 크리스챤들이 일찌기 그렇게 많이 타협하는 믿음을 가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교회사에는 그 때가 가장 피를 많이 흘린 시대(the bloodiest)라 기록한다. 로마(혹은 공식적 의식에 매수된)에 절한 사람들은 배교의 티켙인 리벨루스를 받았다. 데시우스가 전쟁에서 죽어 박해가 끝나기 전에 칼타고에서 18명의 크리스챤이 순교를 당했다. 키프리안은 자택 감금으로 살아났다. 251년, 그는 위험을 감수하고 돌아왔다.

258년 발레니우스의 로마 세계에는 또 다른 박해가 휩쓸어갔다. 키프리안도 거기에 포함되었다. 그는 첫 번째 붙들린 사람들 중 하나로서 크리스챤 지도자들의 명부를 밝히도록 강요되었다. 형 집행을 기다리던 키프리안은 시구아 근처의 한 광산에 숨어있는 9명의 크리스챤의 이름을 기록했다. “여기 있는 동안 무지하고 악한 잔혹한 사슬에 묶이게 하라. 이 땅 고난이 지난 후, 하늘나라가 속히 올 것이다. 육신은 굴속에서 편안히 눕지 못해도 그리스도의 신선함과 위로의 품 안에 있게 될 것이다.”

키프리안은 형이 집행될 때 그리스도를 주로 아는 위대함을 설교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 그가 집행관에게 한 선물을 주자 곧 그의 눈이 가리워졌고 그는 평안가운데 자기 생명을 주께 맡기고 장차 펼쳐질 영광을 바라보며 순교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