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냐 진화냐?”의 문제는 오늘 내일의 논쟁이 아니다. 지금은 진화론의 허구성이 드러나고 창조론이 우세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최근 2011년 지구 종말이 온다는 어떤 영화감독의 주장은 새, 지렁이, 뱀 그리고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하는 현상과 이상 기온으로 우주의 큰 변화 때문이란 생각의 배후도 진화론이다. 이론이란 한 사람의 합리에 근거한 전제이지 절대 진리가 될 수 없다. 성경이 말한대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뿐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자는 창조와 섭리와 구속을 자연히 믿는다. 이것은 예수님이 친히 그렇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 예가 요한복음 6장이다. 오병이어로 5천명 이상 군중을 먹이는 사건과 그것에 관한 해석과 적용이 나온 거기서 우리는 예수를 믿어 영생 얻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
첫째, 그 기적은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오병이어가 상징주의(Symbolism) 혹은 그림자(Shadow)라면 예수님은 실체(Reality)이다. 그래서 오병이어를 먹고 배부른 사건은 예수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고 더 풍성히 얻는 실재를 보여준 것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광야 40년간, 만나를 내리심을 지적하시고 곧이어 그 기적의 실체를 드러내어 우리로 육신의 유익을 구하기보다 예수를 구하게 하셨다. 이것이 일차적 목적이다.(6:33-35)
둘째, 믿는 것을 먹는 것으로 설명했다. 믿는 것은 이론적 동의나 감정적 일치를 넘어, 전체를 위탁하는 헌신을 가리킨다. 그래서 예수님은 참된 음료와 참된 양식인 예수의 죽음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 표현했다.(55) 배고픈 자가 음식을 먹을 때 가식이나 장벽없이 액면그대로 먹고 마시는 것이 믿는 것이다. 그 분과 어떤 틈이 존재하지 않는 100%의 연합을 가리킨다.
셋째, 예수 믿는 것은 성부의 계획이 성령의 인도로 성취된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된 것은 충동적인 동기에서 시작하지 않고 창세전, 성부의 계획에 따라 성령의 인로 성자에게 오게 된다.(44) 성부의 인도 없이 예수께로 나올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 그에게 와 진실히 믿는다면 그는 성부가 이끈 사람이다. 그 시작이 창세전이며 성부의 가슴에서 시작하여 성령의 이끄심으로 성자를 자기 주로 영접하는 것이다.
넷째, 예수 믿는 것은 결속의 개념이다.(56-57)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주가 내 안에 내가 주 안에 있어 생명을 나누며 예수로 인해 사는 것이다. 구원받은 신자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일에 총집중한다.(요15:5)
다섯째, 예수를 믿는 것은 그의 죽음을 믿고 그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수의 말씀과 관련이 없는 믿음은 가짜이며 영생을 갖지 못한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삶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은 예수님과 그의 말씀인 성경이 모든 판단과 분별의 기준이며 중심임을 믿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성경이 창조를 말하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다. 진화론은 단지 천박한 이론이지 그것이 성경의 창조론을 앞설 수는 없다. 이것은 예수님을 진리로 믿는 자의 확신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성경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 있는 자는 자연히 그의 가르침을 그대로 믿는다. 진화론의 허구로 가득 찬 우리 시대는 성경적 창조론으로 돌아가야만 비로소 짐승의 윤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질 수 있다. 그때 “주 안에 있기 전에 진정한 평안이 없다”는 어거스틴의 고백을 이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