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전달의 채널

우리 시대는 진리를 감정에 호소하여 마음에 전달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 지성의 호소보다 감정과 감각에 호소하여 진리에 대한 반응을 기대한 다. 과거 고전음악이 주축을 이룬 교회음악이 감성에 민감하게 호소하는 현대음악을 채용하여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다. 이에 교회 중심이어야 할 설교에도 그 내용과 스타일이 지성보다 감정의 통로로 마음에 이르게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지 오래이다. 성경 내용을 풀어주어 진리를 마음에 심으려는 방법보다 모인 청중의 기호에 맞추다 보니 아예 본문을 읽어놓고 자기 체험이 주축이 되어 청중을 감동시키려는 설교를 많이 한다. 그리고 영상시스템을 이용하여 시선을 집중시키려는 방법이 각광을 받고 있다. 웃으면 건강에 좋다 하여 인위적 웃음이 마치 복음의 은혜인줄 알고 웃음을 연습시키는 일이 죄를 살피고 회개하여 오는 기쁨과 평안을 대신하여 참 복음의 삶을 혼돈케 하거나 혼합시키는 교묘한 운동이 일어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이것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대답을 생각해 보자.

첫째, 그 원인은 현대인의 세속화 물결이 교회에 깊이 침투했기 때문이다. 극단적 인본주의 즉, 인간만능사상 혹은 인간주권사상이 여러 매체를 통해 그리스도인 사상에 교묘히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르네상스 철학이 오랜 세월 동안 교회의 설교와 가르침 속에 흘러들어와 무분별한 타협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명목으로만 예수님을 모신 것이지 실제로 예수님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다. 물론 복음전파라는 목적아래 세상의 눈높이로 낮추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란 변명을 할지 몰라도 분명한 것은 성경적 복음이 퇴색되었 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복음과 복음 전파 방법과 그 결과까지 명확히 말해 주기 때문이다. 부흥, 신앙 성장을 강조하다보니 세상의 경영원리인 물량주의 나 마케팅 전략이 어떤 검증을 걸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수직적 신앙이 수평적 문화 안에서 어떤 문화충격으로 다른 형태의 생활을 만든 셈이다. 그래서 지성보다 감정을 통해 마음에 이르게 하는 편한 길을 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그러면 이 두드러진 시대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까? 그 대답을 16세기 말의 영국 퓨리탄 설교자에게서 듣는다. 리챠드 빽스터 같은 청교도 설교자의 특징은 지성에 호소하여 마음까지 나가게 하는 것이었다. 바로 깨달은 성경본문에서 진리를 끌어내어 현실의 삶에 맞는 진리를 적용할 때 감 정보다 지성의 채널을 통해 마음(영혼)에 이르게 했다. 진리는 감정보다 지성을 통해 나아갈 때 효과적인 열매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요8:13- 31)

구약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 죽음까지 열거하며 너희도 조상들처럼 행한 다고 적용했던 스데반은 군중의 돌에 맞아 순교를 당했다. 진리를 적용하고서 죽임을 당한 것이다. 감정을 통한 설득보다도 지성을 통해 마음에 와 닿게 한 것이다. 이것은 스데반만이 아니라 구약 선지자들, 심지어 우리 주님에게도 나타남을 성경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진리 전달 채널에 감정을 도외시 할 수는 없지만 감정보다 지성에 깨우침으로 마음에 전달하는 일이 현대 교회가 회복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