쥴리어스 팔머 (Julius Palmer 1556)

탁월한 한 학자로 캐톨릭에 헌신한 쥴리어스 팔머는 개신교 순교자들이 고통 속에서 기쁨과 평안의 모습으로 죽는 모습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일이 그를 혼란케 했고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그는 그들의 믿음은 거짓이고 아무 근거도 없는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거짓이라면 박해자들에 대하여 어떤 악의를 가지고 대들어야하고 그것을 위해 죽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악의 대신에 도리어 긍정적인 평화의 모습으로 불타는 그들을 보았고 그 경험이 그를 괴롭게 했다.

쥴리어스 팔머는 그의 아버지가 시장으로 일하는 커벤트리에서 출생했다. 옥스포드에서 그는 라틴어와 헬라어에 최고 우수한 학생으로 인정을 받았다. 쥴리어스는 변론에 우수했고 배우려는 열정이 너무 강해서 연구와 집필을 위해 아침 4시부터 정상업무를 시작했다. 그는 옥스포드에 있는 막델란 대학의 논리학 교수가 되어 학문적으로 최고의 탁월한 자리를 차지했다. 개신교의 소년 왕 에드워드 6세의 짧은 통치 기간에 캐톨릭 학자들 특히, 그들의 신앙을 고안하고 젊은 학자들에게 그 길을 가르치는 논박자들을 대하기란 쉽지 않았다. 1553년 초기, 줄리어스는 막델란에서 그의 자리를 박탈당했다. 대학 일을 할 수 없게 된 그는 병든 왕의 죽음과 교활한 캐톨릭 여왕, 메어리의 통치 직전까지 한 부유한 집의 가정교사로 일했다. 그는 즉시 막달랜에서 다시 등용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모든 일이 잘된 것이 아니었다. 캐톨릭의 실행과 지식이 그에게 즐거움을 주지 못했고 영국 교회에 대한 메어리 여왕의 척결법으로 개신교도들을 화형시키는 일에 대해 큰 갈등을 갖고 있었다. 더욱이 쥴리어스는 신앙에 있어서 확신에 사로잡힌 그 용감한 이교도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들의 동기에 영감을 얻고 그들의 고난의 재판기록을 연구했다. 1555년에 팔머는 래티머와 리들리가 화형당하는 것을 보았고 그들의 강한 증거를 들었다. 그 연구로서 줄리어스는 스스로 변화 되었다.

이 변화와 선한 믿음 때문에 팔머는 옥스퍼드에게 쫓겨났고 공부하는 마을의 한 교사가 되었다. 곧 그는 가련한 자로 주목되었다. 그가 개신교로 기울어진 것을 안 마을 사람들의 반대에 직면하자 그는 그곳을 떠났다. 돈벌이를 할 수가 없고 취직하기 어렵게 되자 그는 자기 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자기에게 나눠주기를 요구했고 그의 어머니는 “네 아버지가 이교에게는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대답했다.

팔머가 자기 살림살이를 모아 그 마을 떠나기 위하여 돌아가는 일이 자동적으로 규정을 위반하는 셈이 되었다. 그는 즉시 체포되었고 그의 새로운 확신에 대한 철회를 조건으로 안락한 생활을 위한 모든 물품을 제공하겠다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그에 응하지 않고 그가 연구한 사람들의 길로 가므로 쥴리어스 팔머는 법정에서 정죄를 받았다. 1556년 7월 15일에 팔머는 다른 두 사람과 함께 화형을 당했다. 그러나 교회가 이 용감한 순교자들에게 준 마지막 말은 시편 31편에 나온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는 것이었다. 쥴리어스의 생각과 마음이 그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아마 그 자신이 그 일로 놀라게 되었을 것이다. 그가 따르던 진리를 확신한 그는 그 결과를 받을 책임을 갖게 된 것이다.

팔머의 재판관들은 쥴리어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어리석게 충고하기를 “ 더 늦기 전에 너의 황금시절, 아름다운 꽃과 같이 혈기가 왕성한 젊은 시기를 잃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자 학자인 팔머는 한 비유로서 응수하기를 “선생님, 나는 결코 퇴색하지 않는 꽃들을 갈망합니다.” 지금 그는 죽음으로서 그 속에서 춤추고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