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각성운동의 선구자 에드워드는 최초의 성령의 부흥을 창세기 4:26, “그 때(에노스)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는 구절에서 찾는다. 그 후 에녹, 노아, 아브라함, 모세, 요시아, 스룹바벨,.. 등으로 이어갔다고 주장한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이 왜 성령의 부흥인가?
첫째, 부흥직전의 시대적 정황 즉 가인으로 시작하여 건설된 문화 사역이 창세기 4장에 나온다. 건축의 조상, 악기의 조상, 유목의 조상들이 나타난 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일반은총의 증거이다. 그들의 문화 속에 자리 잡은 죄악이 기하급수적으로 퍼져 가인 5대손, 라멕에 이르러 일부다처주의와 살인으로 까지 발전, 7배보다 더 많은 77배의 징벌을 거론하는 잔인함을 지닌 채 살아가는 모습을 그의 “검가 (23)” 에서 보게 된다. 당시 문화와 예술은 죄악의 도구가 되어 셋의 후예마저도 경건에서 멀어지게 한 것처럼 보인다. 경건을 떠난 것은 궤도를 이탈한 위성처럼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문화를 통해 죄악은 하나님의 백성을 더 타락시키고 만 것이다. 이때 부흥의 영이 부어진 것이다. 시대가 어두울수록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의해 부흥이 시작되는 법이다. 그 속에서 새 일이 시작되었다.
둘째, 여호와 이름을 부르는 것이 왜 부흥인가? 어떤 이는 기도한 것으로 보고, 다른 이는 공적 예배를 드린 것으로 생각한다. 200년 이상 기도 없는 시대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을 모세는 왜 강조했을까? 기도가 없다면 삶의 목적을 잃은 증거이고, 불순종에 떨어진 증거이고, 하나님 나라의 의, 평강, 희락의 맛보다 불의, 불안, 불만으로 채워진 죄의 종이 되었다는 증거이다.
그런 중, 셋의 후예 속에 계신 경건의 영이 그들을 인도하여 기도 하게 하다가 하나님의 정한 때에 공동체가 모여 예배하며 기도한 것처럼 보인다. 기도와 예배는 셋의 자손들의 의무였기 때문이다. 부흥에는 언제나 경건한 자의 부르짖는 기도가 선행되었다.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사울이 먼저 한 일이 기도인 것과 같다. (행9:11) 기도 없이 부흥이란 없다. 성령의 부으심은 언제나 기도의 통로를 사용하신다.
셋째, 부흥의 실재와 결과는 어떠했는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모의 마음이 부흥의 실재이다. 성령이 기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부요를 사모하게 하심으로 부흥의 불을 붙이신다. 의에 주리고 목마름의 마음이야 말로 가난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 그리고 온유한 마음을 거친 후에 찾아오기 때문이다.(마5:3-6) 참 성도는 복음의 꿀도 사모하지만 복음의 몰약도 사모한다.(Thomas Watson)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2:21)는 요엘의 계시가 이때에도 적용된 것이다. 이것이 성령이 부어진 부흥의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