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만족

고난을 통해 고난을 이기며 사망으로 사망을 이기는 일이 기독교의 독특한 진리중 하나이다. 이는 구약에 예언된 것이 신약에서 성실하게 성취됨을 보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42장에 나타난 성령을 받은 여호와의 종이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고 상한 갈대로 꺾지 않는 긍휼의 사람으로 보인 것이 53장에 고난으로 자기 백성의 모든 죄를 처리하시고 그 안에서 만족을 누리는 고난의 종으로 묘사되었다. 이것을 이사야는 형통이라고 하였고 만족하였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을 가리킨다. 그 일이 완전했기에 성부를 만족하셨고 그에게 속한 씨들인 교회를 만족시키는 원천이되었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11)

첫째, 스스로 만족하신 고난의 종은 누구인가? 어떤 이는 히스기야, 이사야 혹은 당대 경건한 선지자 중 하나로 지목하나 복음의 빛을 비추어 볼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 외에 다른 이가 아니다. 그 사용된 용어가 절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5,10) 그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령은 700년후 종말 시대에 오실 그에게 초점을 맞추었다.(행8:31 사53:6) 영광의 종이 되기 전에 그는 먼저 고난의 종이 도셔야만하셨기 때문이다. 정말 그리스도만이 구속의 길, 진리, 생명되시기에 모든 것은 반드시 그를 통해야만한다.(빌2:9-11))

둘째, 그 종은 무엇으로 만족하셨나? 고난의 극치인 그의 죽음이 성부의 의를 만족시키셨다. 그 종만이 유일한 속건제물이 되신다.(사53:10) 적은 죄 하나가 생각 날 때 드리는 제물처럼 그의 죽음은 지극히 작은 죄책 하나까지도 다 처리하신 넉넉한 효력을 가진다. 그가 마른 땅에 나온 뿌리처럼 모양도, 풍채도 없이 오셨고 사람들은 싫어 버린 바되는 치욕을 당한 일 모두가 대속물로서의 고난을 당한 것이다. 그의 죽음의 모습이 너무 처참하여 놀랐다가 자기를 대속하신 고난임을 알게 되자, 도리어 놀라게 되는 독특한 죽음이었다. 이 길만이 자기 백성의 죄, 죄책, 형벌, 그리고 영원한 사망을 모두 처리할 수 있기에 스스로 그 길을 가신 것이다. 서슬이 퍼런 성부의 의의 칼날을 친히 받으심으로 단번에 자기 백성의 모든 죄를 처리하시고 넉넉한 구원늘 완성하신 것이다.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 상의 절규는 완성을 알리는 나팔 소리와 같다. 이사야는 종이 행한 절대 고난, 절대 죽음의 사건을 바라보고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셨다고 말함으로 그 고난의 영원한 효력을 선포한다. 성자는 성부의 만족을 아셨던 것이다. 그 만족이 그 안에 있는 씨들 곧, 교회의 만족을 가져왔다. 실제로 바울은 약할 때도 만족하고 풍부에서나 빈궁에서나 항상 만족한다고 확신한 것은 그 뿌리를 종의 만족에 두었기 때문이다.

셋째, 그러면 무엇이 종이 가진 만족인가? 그러면 종의 만족이 교회의 만족을 안겨준그 상태는 어떤 것인가? 교회가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의의 표준에 이르렸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을 받아 누릴 수 있는 그릇으로서의 변화가 일어난 사실이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그 만족으로 능력을 체험하고 샘솟는 기쁨과 시공간을 뒤어 넘는 초자연적 즐거움을 누린다. 종의 만족이 사막을 오아시스로, 곤비한 땅에 쉬게하는 큰 바위의 그늘이 되었기 때문이다.

욕구불만으로 채워진 우리 시대의 교회는 이 만족으로 돌아가야한다. 홍해를 건널 때 기뻐한 이스라엘이 3일간의 물 없는 고통과 마라의 쓴물로 원망한 것처럼 온갖 불안의 사건들이 우리에게 찾아온다. 그 때 우리는 종의 만족을 사모하고 그 은혜를 기다려야한다. 종의 만족으로 채워진 마음만이 치료의 하나님을 만난 것이고 엘림의 일반은총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가치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참 만족을 체험케 하시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