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전후 많은 사람들처럼 죤 필포트도 변화하는 세계관의 손 안에 사로 잡혔다. 한번 맛 본 그 사상은 위험하였고 두려움과 욕망에 이끌린 사람은 정죄를 받는 자리에 앉게 되었다.
필포트는 특혜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의 부친은 기사였고 그는 옥스퍼드 대학을 다녔다. 참신한 성격을 보충하기에 좋은 마음을 가진 필포트는 한 지도자요, 교회의 개혁자로 성장했다. 그는 폭넓게 여행하여 영국 해안을 너머 먼 해외 정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 뜻을 펼치기 위하여 고국으로 돌아왔다. 소년 왕, 에드워드 6세는 필포트의 개혁적 신앙을 좋아했다. 그래서 죤은 윈체스트의 새 부주교로 임명되었다. 미래는 평탄했고 뻗어갈 수 있는 보장을 받았다.
곧 바로 상황이 변했다. 에드워드가 죽고 레이디 제인 그레이가 불행하게도 짧게 통치한 후, 메어리 1세가 왕좌에 올랐다. 그녀는 철저한 캐톨릭 신자였기에 개신교 개혁자들을 반대했다. 생각이 깊은 필포트는 자신에게 엄습한 새로운 난관을 그대로 받아드렸다. 그러나 기사의 아들이며 옥스퍼드 출신으로서의 교회 지도자인 그는 자기 목표를 포기할 수 없었다.
메어리가 만드 학살 명부에 들어간 필포트는 그의 의무가 약화되었고 자기 견해를 변호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는 감옥과 감금의 여러 체형에 의해 분리된 13개의 질문에 지성적인 확신으로 응답했다. 여러번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마치 지성의 도구가 부재하여 자기 신앙을 포기하고 여왕의 종교법을 수락한 것처럼 하기 위해 책이나 펜을 주지 않았다.
지성적으로 패배했으나 강한 정권을 가진 영국의 비밀회의는 필포트의 이단 교훈이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제하기 위하여 최종적 검토를 위해 14번이나 모였다. 그는 20개월 이상 여러 감옥에 있었다.
그의 마지막 질문은 그 문제에 대해 참신한 단순성을 가졌다. 행한대로 믿은 이유가 무엇이든지간 필포트는 포기하고 죽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왕조는 승리를 예상하는 편에게 패배로 끝내는 것처럼 바람이부는대로 움직이는 열정에 더 이상 흥미가 없었다. 마음과 정신이 완전히 변할 수 없는 필포트를 화형에 처하도록 판결했다.
1555년 12월 18일은 형장으로 가는 길에 진흙탕을 가로지르기 위하여 죄수를 경호하는 집정관이 흙탕을 피하기 위해 두 사람의 부축을 받고 싶은가고 물어보았다. 그는 날카롭게 “당신은 나를 교황으로 만들려하느냐? 나는 내 발로 나의 순례길을 마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마침내 집행 장소에 도착한 필포트는 “내가 이 형틀에서 고난으로 경멸을 당하지만 나의 구속자는 나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최대의 고난을 거절하지 아니하셨다.”고 말했다.
불의 열기가 발에 닿자 필포트는 시편 107, 108편을 암송했다. 순간 그 나라가 바라는 뜻은 끝났다. 목소리가 사라지면서 그에게는 순교의 면류관이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