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위살트(1546)

스코틀랜드의 애버딘의 왕의 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설교자, 위살트는 개혁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1538년, 이단의 죄 몫으로 정죄를 받아 주목되어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1544년 그는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그 해 위살트는 도시를 휩쓴 흑사병에 의해 고통당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던디에 있었다. 비톤의 공격이 심해질 때 위살트는 자기 사명에 대해 말하기를 “그들은 고통 속에 있기에 위로가 필요했다.”고 했다. 던디에서 위살트의 설교를 들은 후 외투 속에 단도를 들고 온 비톤 계열의 존 와이톤 사제가 있었다. “나의 친구여 당신은 무엇을 가지고 싶은가?” 라며 위살트는 와이톤의 무기를 바라보면서 너의 뜻을 실현시키라고 소리쳤다. 두려워한 그 자객은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자객을 끌어내라 우리 힘으로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위살트는 그들을 꾸짖으며 자기 팔로 와이톤을 끌어안으면서 ”누구든지 그를 해치는 사람은 나에게 해를 당할 것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심스럽게 가르치도록 많은 선을 베푼 분이다. 불행하게도 그 날은 위살트가 기대하던 것보다 더 빨리 왔을 뿐이다.“고 말했다.

추기경 비톤은 1545년 12월에 위살트를 잡고 보스웰의 얼에서 또 다른 악한 일을 꾸몄다. 보여준 고난 속에서 위살트는 고백을 받아들이는 것을 강하게 거절했다. 위살트는 자유 의지를 부인하고 무한한 하나님께서 사제들의 손에 의해 한 곳에만 알려질 수 있다는 개념을 거절하기 때문에 고백이 성례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대신, 위살트는 참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어디서나 신실하게 가르쳐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살트는 자기 생명을 스코틀랜드의 개혁을 일으키는데 바쳤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 병든 자들 그리고 소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위살트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나누어졌다고 믿었다. “나는 구원의 말씀을 당신에게 드리나이다. 나의 생명을 무릅쓰고 당신 속에 남아 있으며 나의 하나님에 의해 선포된 나의 순결을 남겨야만 하나이다.” 죽기 전 몇 분, 위살트는 다른 사람들 곧 그의 마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하늘의 아버지여 그들을 용서하시고 나를 속인 무지와 악을 용서하소서. 나는 그들의 요구를 마음으로 용서하나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몰라 정죄한 그들을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했다. 그의 친구들은 분명히 그렇게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1546년 3월 1일 위살트는 스코틀랜드의 세인트 앤드류 성 밖에서 화형을 당했다. 추악한 추기경 비톤이 성 안쪽에서 지켜보면서 모든 것이 잘 돌아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