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자들은 쟌 후스를 죽여야 하되 아무 소망 없이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우리는 구원의 잔에서 너를 제한다.”고 재판장은 준엄하게 언도했다. 그러나 후스는 말하기를 “나는 전능하신 주 하나님을 믿으며 그는 구원의 잔에서 나를 제하지 않으실 것이고 나는 그의 나라에서 오늘 그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라고 응수했다.
성찬의 잔이 후스가 저지른 죄의 열쇠이다. 1370년에 남 보헤미아(지금 크제크 공화국)의 마을에서 출생하여 그의 어머니의 발아래서 기도를 배웠다. 가족의 가난을 피하기 위하여 다른 유익, 돈, 명성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도 젊은 후스를 사제로 양육한 것은 그의 어머니였다. 평범하나 어렵게 일하는 학생, 후스는 프레그에 있는 대학으로부터 신학석사학위를 받았고 1402년, 베들레헴 교회의 설교자가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대학 운영자들에게 그의 사상이 알려진 개혁자, 존 위클맆이 영국에 도착했다. 그 사상의 핵심은 성찬 잔의 성격에 있었다. 주님 만찬의 잔이 미사 때 그리스도의 피로 실제로 변한다고 얼마나 가르쳐 왔는가? 독일과 로마 신학자들이 환영했으나 체코사람들과 위클맆 지지자들은 반대했다. 그래서 그 컵은 어떤 동기에 의해 화장용 장작더미를 운반하는데 이용하는 개혁의 상징이 되었다. 15세기 초엽 시대는 위험하였다. 교회는 프랑스와 로마에 두 명의 교황으로 나뉘었다. 소위 대 분열(1378-1417)은 모든 지도자, 정치가 혹은 교인들로 그들의 승리를 없애기 위하여 어느 편에 서서 기대야만 했다. 교회의 존속과 미래를 위하여 균형을 맞추어야만 했다.
설교자 후스에 대한 쟌 위클맆의 영향은 분명하게 현실적 위험에 직면하게 했다. 1405년에 후스는 어떤 교구 감독들을 골탕 먹이게 하는 사제의 죄를 들먹거리기 시작했다. 보헤미야 교회가 그리스도의 피가 성찬 잔에 나타난다고 주장할 때 후스는 “이 사제들은 지옥에 갈 자들이다. 그 이유는 그들의 간음, 탐욕 그리고 살찐 돼지이기 때문이다”고 화길한 말을 들어냈다. 폭발하기 쉬운 그 말이 교회에 퍼졌다. “그들은 그들의 이중적인 턱에 걸고 자기의 배를 채우는 대식가들이다.”고 했다. 그 후 교황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신령한 은혜를 팔아먹는 속죄부와 맞선 것이 후스의 위법행위가 되었다.
후스는 4번이나 파문을 당했다. 2년 동안(1412-14) 그는 보헤미아 남부 마을에 추방되어 고역하면서 머리로 글을 쓰고 전하는 일을 계속했다.
1414년 10월에 교황 요한 23세는 콘스탄스회를 주선하여 쟌 후스로 출두하도록 초청했다. 두 가지 큰 목적이 회의 안건에 들어있었다. 분쟁을 끝내고 유럽에서 이교도를 근절시키는 것이다. 안정된 행동을 약속받은 후스는 그 초청을 받아들이면서 “거위는 아직도 요리되지 않았고 요리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조크를 했다.
일주일 안에 그는 체포되었다. 수개월 동안 후스는 콘스탄스 호수의 섬에 있는 도미나칸 수도원 감옥에 갇혔다. 단지 비난을 피하기 위한 것이 예상되는 죽음을 알리는 죽음의 자리가 되었다.
후스는 일반적 비난 즉, 위험한 이교도, 크리스챤의 이름을 더럽힌 자, 악인, 하나님의 넷째 인성의 선생이라는 모든 비난을 받았다.
1415년 6월 조소와 비난 속에서 교회는 그의 영혼을 마귀에게 주었다. 후스는 군중의 밀치움을 당하면서 콘스탄스 거리를 지나 부풀어 있는 화형장에서 목까지 건초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노래하면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