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는 바울

바울은 다메섹 체험 이후 초대 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로 쓰임 받았다. 바리새인 중 바리새인이요, 율법학자요, 경건한 유대인이요, 헬라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는 삼층천 체험 및 많은 은사를 체험한 사람으로 신약의 절반 가량을 기록한 계시의 도구이다. 이만하면 얼마나 많은 것을 얼마나 재빠르게 응답을 받을만한가? 현대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일사천리요, 만사형통이요, 백전백승하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로마서를 읽다보면 바울의 이해할 수 없는 면모를 본다. 그것은 그의 기도 제목과 그의 사업이 너무나 인간적이라는데 있다는 점이다. 세계의 수도, 로마에서 복음 전하는 것이 그의 기도 제목이었다. 그러나 단번에 기도 응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 해 기도하면서 여러번 길이 막힌 경험을 했다. 믿사오니 하고 나갔더니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고 여러 해를 인내로 기다리고 기다렸다가 그것도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가는 것이다. 얼마나 인간적인가? 그 역시 당하는 고생이 많았다. 어려운 시험 틈바구니에서 고독과 난관과 싸우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었다. 우리도 주님 섬김에 기적, 능력, 희한한 일만을 추구하다가 낙심하지 말고 여러 고난 속에서도 인내함으로 주님 나라를 세우는 것을 더 좋아 해야 한다.

그는 로마 교인들에게 기도 부탁을 한다. 대사도 역시 성도의 도움이 필요한 약한 인간이다. 다메섹의 체험을 했다고 해서 자기 멋대로 나간 것이 아니다. 아라비아 3년의 연단, 예루살렘 교회의 원사도들에게 자기 교훈을 점검 받고 확인된 다음 나아갔다. 그리고 교회의 기도를 존중히 여기고 하찮아 보이는 일에도 기도를 부탁하였다. 그 기도 제목은 유대의 순종치 않는 자의 손에서의 구원과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김을 성도들이 받음직 하게 되기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는 것이 기도 제목이었다. 얼마나 실제적이요 얼마나 겸손하며 얼마나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엿보이는가? 오늘날처럼 큰 비죤, 적극적 사업, 큰 목표, 큰 열매, 세대를 주름잡는 교회 능력, 눈에 보이는 것에 치중하여 자만에 차있거나 없으면 한숨 쉬는 가치관과는 얼마나 대조를 이루는가? 그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없는 자처럼, 겸손히 주님의 방법으로, 주님의 주시는 힘으로만 하려했다.

물량주의, 기적주의, 그리고 기복주의의 그릇됨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으면 좋겠다. 바울의 인간적 섬김의 사역을 바라보고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어야한다. 성경의 밝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 교회의 모습을 바로 발견하고, 우리 모두 바울처럼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인간이 되자! 인간은 인간이지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적 깨우침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