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곧 잘 삶의 모델로 아브라함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성경을 연구하다보면 아브라함도 별 수 없는 인간임을 배운다. 우리처럼 한결같이 약하고 거짓되고 악한 부패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런 아브라함을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니, 복 받은 사람이니 하는 것은 피상적 관찰인 셈이다. 물론 우리 주님이나 사도들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올라갈 수 없는 나무처럼 높이려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흐름을 자세히 따르다 보면 그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그 예가 바로 왕과 아비멜렉 앞에서 두 번씩 목숨을 부지하려고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인 일이다. 이처럼 얼마나 거짓되고 약한 사람인가?
심지어 둘째 사건은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 약속을 받은 은혜를 체험한 직후에 일어난 일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위기를 무사히 넘겼지만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결코 그의 장점이나 선행에 있지 않고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배운다. 그래서 창15: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롬4:9 참조)라고 했다. 이 말은 구약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은 것이지 자기 선행과 순종으로 하나님 의의 표준에 이를 수 없었다는 뜻이다. 신약이나 구약이나 누구나 믿음으로만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공로로만 의롭게 되기에 우리는 아브라함을 볼 때마다 참 믿음을 배운다. 우리의 공로가 아닌 예수를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롬1:16-17) 이것을 칭의(justification)라고 한다.
성령님이 오셔서 회개케 하시고 예수의 공로를 내 것으로 믿게 하여 새사람이 되게 하신다. 하나님이 믿은 우리를 의롭다고 봐 주신 것이다. 구약의 라합이나 신약의 삭개오나 수가성 여인의 의인됨도 바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된 것뿐이다. 이 신분의 변화는 믿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런데 이 칭의는 영원한 효력이 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의인으로 당당히 나갈 수 있게 한다. 이 의로 말미암아 실질적 의인으로 살도록 조금 조금씩 이끌어 가심을 성화(sanctification)라고 한다. 우리 속에 의의 씨를 심어 놓으신 하나님은 우리를 주님 닮은 의의 사람으로 변화를 시키시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이 의를 가정, 사회, 그리고 교회의 기초로 하여 의로 나라를 이루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를 주시기 위하여 대신 죽어주신 주님을 묵상함으로 값없는 의를 생활에 누리자. 그리스도인 속에 의가 잘 성장하여 아름다운 의를 가져오도록 날마다 주께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