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경건(욥1:1-12) 찬 27장
아브라함시대로 추정되는 욥은 경건의 본이 되는 인물입니다. 에스겔과 야고보는 욥을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어떤 점이 본받아야 될 것입니까?
첫째, 경건한 인격을 본 받아야합니다. 2절에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고 했습니다. 그의 지정의가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모습을 보입니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인 공의와 공도를 행하는 인격을 욥에게서 보기 때문입니다.
둘째, 작은 죄를 두려워한 인물입니다. 자기 자녀들의 생일잔치에 마음에 지을 가능한 죄를 찾아 제사 드리는 경건의 수준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항상 그러했습니다. 생활에 정착된 것이란 말입니다.
셋째, 하나님도 인정하는 경건이었습니다. 사단 앞에서도 하나님이 칭찬할 정도였습니다(8). 복음 받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수준은 욥과 같아야합니다. 성령과 말씀을 순종하는 경건으로 무장하여 하나님의 눈에 드는 신앙의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1차 시험(욥1:13-25) 찬 247장
욥의 고난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한 면은 하나님이 연단하기위해 허락하는 것이고 다른 면은 죄를 짓게 하려고 마귀가 던지는 유혹입니다.
첫째, 소유물에 대한 시험. 네 차례의 긴급한 보고는 생각 만해도 아찔합니다. 도둑이 와서 약탈했고, 벼락 맞아 죽고, 떼거리의 의도적 공격을 받았고, 열 자녀들이 잔치석에서 압사당한 것입니다. 연거푸 당한 시련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둘째, 신앙의 태도. 재를 무릅쓰고 내려앉아 하는 말이 “주신 자도 하나님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시오니 하나님이 찬송을 받으셔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의 손을 잡는 길이 그가 피하는 최선의 길이었습니다.
셋째,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말이 온전할 때 온전하다는 야고보의 말이 욥에게 해당됩니다. 불평과 원망하기 쉬운 입술을 지켜 감사와 찬송을 했으니까요. 경건의 훈련이 그를 견고하게 만든 것입니다.
2차 시험(욥2:1-1-13) 찬 197장
욥의 경건은 또 한번 드러났습니다. 강도 높은 2차 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입니까?
첫째, 불치병에 걸렸습니다. 악창으로 온 몸의 가려움증이 극심했습니다. 소유물 시험보다 더 예민한 시험입니다. 그러나 욥은 재에 앉아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살폈습니다.
둘째, 아내가 경멸했습니다. 마귀는 아내를 통해 그를 찌릅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말이 큰 고통으로 다가 왔습니다. 아내마저 신앙의 순전을 미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욥은 “당신은 어리석은 여자 가운데 하나같다”고 응수했습니다. 복도 받고 재앙도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셋째, 친구 통한 공격입니다. 세 친구가 소문 듣고 와 온갖 예의를 갖추며 권고가 욥의 고통을 더하게 했습니다. 같이 금식하고 같이 있는 것이 위로가 되었지만 하나님의 계시를 알기 전에는 그들의 권면이 도리어 큰 짐이 되었습니다.
어떤 시험 앞에도 살 수 있는 길은 주권을 인정하는데 있습니다. 이 신앙으로 나아갑시다.
욥의 탄식(욥3:1-26) 찬 337장
욥이 생일을 저주합니다. 왜 이런 약한 소리를 했는가요?
첫째, 하나님 앞에 선 인간 존재가 철저한 무능자임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1-12)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영안을 열어 인생 밑바닥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 아래서 자기를 본 것입니다.(시36:7)
둘째,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가장 복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13-19) 동시에 그 빛 아래서 임마누엘이 최고의 행복임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를 아는 사람은 절대로 자살할 수가 없습니다. 도리아 창조의 세계로 나아갑니다.
셋째, 일상생활 자체가 귀함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평강과 안온과 안식이 이 연속되는 탄식과 아픔 속에서도 그 날의 사는 것 자체가 복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고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나로 족하다는 주님의 경지에 들어간 것입니다.
진리 안에서의 욥의 탄식을 소유하는 성도가 됩시다
엘리바스의 1차 권면(욥4:1-21) 찬 189장
욥의 고난을 목격하고 함께 재에 앉아 동참만 세 친구 중 연장자인 엘리바스가 욥을 처음으로 권면했습니다. 어떤 것입니까?
첫째, 은밀한 중에 저지른 죄를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경건과 선행에 가리워진 죄를 회개하라고 다그칩니다.(6-7) 드러난 의를 기준삼아 진실을 토하라고 말합니다. 욥의 이성에 호소하여 은밀한 외식주의의 죄를 겨냥했지만 은혜의 안목이 부족했기에 욥을 진리로 이끌지 못했습니다.
둘째, 그는 신령한 체험과 인생 경험과 해박한 신학 지식으로 접근했습니다. (12-15)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욥을 위로하고 권면하기에는 부족했고 도리어 죄를 범하는 자리로 나갔습니다.
셋째, 그는 욥의 경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계시의 조명만이 실상을 밝히 보고 해결의 길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의와 은혜가 입맞추는 복음 안에서만 욥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빛 안에 거합시다(롬1:16-17).
엘리바스의 2차 권면(욥5:1-27) 찬 181장
엘리바스는 욥에게 무거운 짐을 안겨주는 실수를 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 같으면 전능자의 경책을 경홀히 여기지 않고 그에게 구하여 환난에서 벗어나겠다고 말합니다. 그 기도응답으로 장수하다가 무덤에 내려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미련한 짓을 하지말고 하나님께 의탁하라는 진리지식으로 권했습니다. 역시 그의 권면에는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간과하여 욥에게 적중하지 못하여 괴로움만 더했습니다.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자는 복이 있다”(17) 는 그의 말이 진리였지만 개인에게 적용될 때는 또 다른 차원이어야 합니다. 진정한 교육과 진정한 카운슬링은 전적으로 성령의 몫입니다. 복음의 권면자로 부름받은 신자는 성령을 전적으로 의존하여 진리를 적용하는 법을 터득해야합니다. 그것은 골방기도로 성령이 역사하실 여지를 남겨놓고 겸손히 기다리는 일이 되어야합니다.
욥의 변증(욥6:1-30) 찬 144장
엘리바스의 능숙한 권면은 문제해결에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하고 도리어 무거운 짐을 더했습니다(15, 21-24). 그 때 욥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자기의 분한과 재앙을 저울에 달면 바다 모래보다 무겁다고 탄식합니다(2-3). 자신이 당한 현실이 얼마나 절박했는지 음식을 보거나 만지는 것도 싫어했습니다(7). 그가 당한 고난은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바산의 황소에 눌린 것처럼 사람에게 버림을 당할 뿐 아니라 하나님에게까지 버림받는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대속의 고난으로 우리가 살아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그림자로서의 욥은 경외신앙을 유지하며 그의 말씀을 지키고 있었습니다(10). 그리스도가 큰 고통 속에서도 성경을 이루려고 “내가 목마르다(요19:28)”고 말씀 하신 것과 같습니다. 어떤 고난이 몰려와도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며 말씀을 지킬 때 반드시 소망을 체험합니다.
인간의 실상(욥7:1-21) 찬366장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에게 참 위로가 되기 위해 성도의 고난을 사용하십니다(고후1:4-5). 욥이 당한 고난이 어떠했습니까? 육체의 고통으로 불면에 시달리며 (4)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다가 잠깐 사이에 놀라는 꿈을 꿉니다(14) .살은 썩어가고(5) 몰골은 말이 아니었습니다(5,8).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숨이 막히기를 원했겠습니까?(15) 육체적 고난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이 정말 지옥같은 시간임을 당해 보지 않은 자는 모릅니다.
이런 중에서도 욥은 하나님의 주권의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분초마다 시험하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을 의지한 것입니다(18). 그리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한 그의 기도는 은혜 받을 그릇이 어떠함을 잘 보여 줍니다(21). 하나님 앞에 선 참 인간으로 돌아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성도로 삽시다.
빌닷의 권면(욥8:1-22) 찬337장
욥의 영적 경지를 이해 못한 빌닷은 여전히 율법의 잣대로 욥의 고난을 사정없이 비판합니다. 그가 한 말은 진리였습니다. 전능자를 구하면 살려주시며 빌고 또 빌면 돌아보시고 미약하나 창대한 날을 본다는 말로 위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갈대가 물 없이 자랄 수 없고 왕골이 진펄에서 날 수 없음같이(11) 욥의 고난은 은밀한 죄 때문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회개치 않으면 망하게 된다는 논리였습니다(22). 욥이 당한 고난의 의미를 알지 못한 그는 위로보다 중압감을 더해 주었습니다.
율법의 의는 복음 안에서만 꽃을 피웁니다. 율법의 의로는 결단코 구원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자기의 무력을 안 바울은 곤고한 자신을 탄식하였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믿음으로 찬송했습니다(롬7:24-25). 형제의 고난을 복음의 빛 안에서 이해하는 지혜자가 되어야합니다.
주권의 손(9:1-34) 찬535장
모진 비판 속에서도 욥은 자아성찰을 통해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며(2) 지혜로우시며 전능하신 창조주요 나와 관계없이 모든 일을 은밀한 가운데 행하시는 섭리주 되심을 깨달은 것입니다(2-10). 그 분 앞에 선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말합니다. 폭풍으로 나를 꺾으시고 이유 없는 고난으로 상처를 많게 하시며 숨쉬기가 힘들 정도의 괴로움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의 손을 의식했습니다.(17-18). 욥은 친구들보다 더 높은 진리 안에서 자기 실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또 무엇이라 설명할 수 없는 자리에서 욥은 하나님의 주인 됨을 알고 그만이 주시는 구원을 갈구했습니다(34).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이란 모든 일을 세밀한 사건까지 친히 다스리시는 주님의 주님되심을 인정하는 마음상태입니다.
비참에서의 기도(욥10:1-22) 찬363장
본문은 괴로운 심정에서 기도한 욥을 보여줍니다. (1) 그의 곤고함은 어떠했습니까?
첫째, 그는 고난을 허락하신 구체적인 이유를 알기위해 하나님께 따지듯이 질문했습니다(2). 주 앞에 선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전제로 하나님의 긍휼을 따라 그 이유를 알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결백을 겸손히 주장하며 진토 같은 인생을 기억해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4-9). 둘째, 그는 자신의 비참함을 여러 가지로 증거했습니다. 사자의 공격을 받은 사냥감 같으며(16) 군대 침략을 당한 전쟁 포로 같으며(17) 겨우 살아난 갓난 아이 같으며(18) 무덤에 던져진 시체(18)같은 비참함을 토로했습니다. 셋째, 그런 중에서도 욥은 겸손한 마음으로(15) 기도하기를 죽기 전에 자기를 구하여 영광 돌릴 기회를 달라고했습니다(21-22). 마치 죽기 전에 살려달라는 다윗이나(시41:13) 히스기야의 간구처럼(사38:16) 환난 날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한 것입니다.
소발의 단견(욥11:1-20) 찬369장
역시 나아마 사람 소발은 경솔한 판단으로 욥을 책망하며 회개하라고 촉구했습니다.
그는 욥을 허망한 사람이라 했습니다(11-12). 겉모양만을 보고 자기 신앙지식과 자기의 경험의 빛으로 볼 때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비취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는 욥을 악인으로 단정했습니다(20). 하나님과 죄와 언약에 관한 그의 지식은 모두 맞는 말이지만 욥에게는 자유보다 짐이 되었습니다. 마치 비료를 너무 가까이 주면 식물이 타 죽듯이 선한 율법이 성령의 빛을 통과하지 않을 때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형제에 대한 권면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사귐이 전제되어야합니다. 진정한 빛은 하나님 앞에 만 머물러있기 때문입니다(요일1:7). 오직 계시의 빛 안에서 되어져야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허황된 분위기 따라 살지 말고 오직 참 빛이신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자기 들보를 뺀 후, 형제의 티를 뺄 수 있다는 주님의 원리를 반드시 기억합시다.
욥의 자아발견 (욥13:14-22) 찬 82장
욥은 고통 중에서도 어릴 때의 죄를 기억하며 “내 허물과 죄악을 알게 해 달라(23)”고 기도합니다. 회개는 책임감으로 나타납니다. 십자가 우편 강도가 같은 주님을 조롱하다가 “우리가 당하는 것은 마땅하다”고 고백하며 책임을 느끼며 주님을 의지했을 때 그 날 즉시 구원을 받은 것처럼 욥은 진정한 영적부요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고통 속에서 자아의 실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입니까?
1) 인생은 낙엽과 가시덤불 같다는 사실과 2) 하나님의 소망이 끊어진 인생은 나무보다 못하다는 사실과 3) 썩은 물건과 좀 먹은 의복 같다는 사실과 그리고 4) 하나님을 잃은 영혼은 전혀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당신은 이 경지를 맛보셨습니까?
성령의 빛을 구하자(욥15:17-35) 찬177장
엘리바스는 욥의 부친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 인생경험이 많고 신령한 체험이 깊은 신학자처럼 권고했습니다. 그 권고는 위로보다 욥의 고통을 더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나무랄 데 없는 전통적인 진리를 소개하고 지혜자의 말을 전합니다. 악인의 일생은 고통이며 강포자의 햇수는 작정되었으며 환난과 고통이 침략하는 왕처럼 홀연히 오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마침내 그는 부요치 못하며 산업이 망하고 흑암에 처하고 하나님의 입 기운에 소멸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적응성있는 진리는 말하지 못했습니다.
온전한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성령의 조명이 없는 정통 신학은 거듭난 영혼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성령의 조명을 겸손히 구합시다.
은혜 안에서의 변화(욥16:1-17) 찬178장
섭리적 고난 가운데 있는 욥에게 그의 세 친구는 번뇌케 하는 위로자였습니다. 과녁삼아 쏜 화살에 적중한 희생물처럼 욥은 비참에 처했지만 그런 중에서도 놀라운 변화를 얻었습니다. 어떤 것입니까?
첫째, 주님의 주인되심을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고난당하기 전, 제 잘난 멋에 살던 철부지한 인생은 하나님의 손아래서 연단됨으로서 자기의 주재권을 그리스도에게 양도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둘째, 정결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연합이 일어난 증거입니다. 진정한 거룩과 정결함은 인간 속에는 건더기가 없고 오직 하나님과의 연합됨으로서만 얻어집니다. 성령이 오신목적주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셋째, 정결한 기도 곧 하나님의 뜻을 따른 기도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참 기도는 고난의 구덩이에서 골방을 찾을 때 배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영생의 길을 가는 자의 체험입니다. 이 변화를 추구하는 성도가 됩시다.
고진감래의 소망(욥19:1-12) 찬539장
욥이 당한 고난을 더 자세히 묘사하는 본문은 주 안에서의 고생은 의미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첫째, 하나님의 무응답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이것은 시편에 나온 다윗 고난의 특징입니다. 그의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의 무응답의 고난을 예견하는 그림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둘째, 뽑힌 식물처럼 소망이 없는 자신을 보고 괴로워했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무 소망 가운데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바울의 심각한 약점은 요긴하게 쓰임받는 강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셋째, 군대가 침입하는 것처럼 중압감이 압도했습니다. 욥은 수치심, 외로움 같은 절대 고난을 인내와 수고와 견딤으로 이긴 것인가요? 결코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감당할 있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주 안에서 고진감래를 추구하는 성도가 됩시다.
순수한 믿음 (욥21:1-16)
욥에게도 다른 사람과의 비교함으로 오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악인은 부귀와 장수를 누리며 잘 되는데 자기는 고난 가운데 있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욥의 확신은 자신은 그들과 다르기 때문에 자기는 하나님만이 나의 소망이며 오직 그 만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박국 선지자의 확신처럼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없고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고 밭에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어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줄거워 한 그 믿음을 지켰습니다. 아삽처럼 종일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원수의 조롱 속에서도 낙망치 않고 하나님을 바라는 소망으로 충만했던 것입니다. 죄악문화로 세속화된 이 세상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길은 오직 하나님만으로 즐거워하는 믿음을 견지하는 것입니다. 이 순수한 믿음을 지키는 가정이 됩시다.
원망을 이기자 (욥23:1-17)
탄식하다 보니 욥은 원망하는 시험에 빠졌습니다. 어떤 원망입니까?
첫째, 하나님 보좌 앞에 나가 호소하며 변명하여 하나님의 대접을 알아 그의 뜻을 깨닫기 원했습니다. 왜 이런 원망이 일어났습니까? 그가 당한 재앙 때문이었습니다. 원망의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만 해결됩니다.
둘째, 그는 다투지 않으시고 들으셔서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실 분은 정직자와 변론하시는 하나님뿐임을 확신하고 그의 의로운 판단으로 난관에서 벗어날 것을 예측했습니다.
셋째, 현실은 그가 계시지 않으시고 전후 좌우로 보이지 않으시고 만날 수 없고 뵈올 수 없게 됨으로 욥을 탄식시켰지만 연단 받아 정금처럼 되어 나오는 확신으로 충만케 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을 따라가며 입술의 명령을 음식 먹는 것처럼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를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경외 신앙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경외 신앙으로 원망의 유혹을 이깁시다.
욥의 깨달음(욥24:1-25) 찬337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진 욥은 전능자의 때에 무지함을 탄식하면서도 그 중에서도 그 분의 의에 대한 지식을 소유했습니다.
첫째, 사람의 악행을 기억했습니다(2). 경계선을 옮기고, 양떼를 빼앗고, 고아의 나귀와 과부의 소를 빼앗고, 빈궁자를 몰아내며 세상의 빈궁 자가 숨어 지내는 악행을 보았습니다. 악의 비참함을 살필 때 겸손해지며 하나님에 대한 눈이 열립니다.
둘째, 소자들의 고통을 헤아렸습니다. 들나귀 같이 광야에서 식물을 먹고 남긴 곡식을 빼앗으며, 악인이 남긴 포도를 따며, 의복없이 밤울 세워 추위에 떨며 바위를 안고 자는 소자의 고통을 알았습니다(5). 고난이 이웃에게 눈을 돌리게합니다.
셋째, 고아의 옷을 전당잡고,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 잡은 무자비한 악인 곧 광명을 배반한 자의 심판을 확신했습니다. 의의 하나님을 보는 눈이 뜨여진 것입니다.
고난은 나쁜 것만이 아닙니다. 도리어 고난은 인간의 실상과 하나님을 알게 되는 수련의 기회인 것입니다(9,13).
온전한 진리로 나가자 (욥26:1-14)찬547장
욥은 세 친구의 부분적 진리의 깨달음이 해가 됨을 말하면서 그것이 어디서 나왔느냐고 묻습니다.
첫째, 온전한 진리는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욥에게 만족을 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진리뿐입니다. 신자의 만족의 원천인 진리 지식에 있어서 차선책은 해를 끼치는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고인 물이 썪는 것처럼 온전한 진리의 자리로 나가지 않으면 쉽게 타락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사도는 온전한 자리로 나가기를 힘쓰라고 권면하였습니다.(히6:1-2).
둘째, 욥의 연단된 인격은 창조주 섭리주 구속주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얻은 것입니다. 오직 예수 안에만 쉼이 있고 소망이 넘칩니다. 진리는 오직 예수뿐이기 때문이며(요14:6) 그의 말씀(성경)만이 진리이고 우리를 거룩케 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요17:17). 온전한 진리 안에 머무는 성도가 됩시다.
선한 양심의 능력 (욥27:1-23) 찬93장
욥의 순전을 지키는 삶은 그 안에 있는 선한 양심의 표현입니다. 본문에는 어떻게 말합니까?
첫째, 결단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으며 순전을 버리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5). 선한 양심에서 나온 선한 결심은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의 근거였습니다. 정말 그는 궁창의 별처럼 빛나는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은 에스겔 앞에서 노아, 다니엘과 함께 욥을 교회의 본으로 삼으셨습니다(겔 14장)
둘째, 고난 속에서도 그는 은혜의 경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6). 자기 평생 하나님의 의를 놓지 않겠다는 양심의 증거를 보입니다.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기에 성령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셋째, 반드시 의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7-23). 선한 양심은 의의 길을 따라 갑니다. 고난 속에서도 욥이 선한 양심을 지키는 것을 볼 때 이미 감당할 능력을 받은 것입니다. 선한 양심을 따라 삽시다.
섭리를 믿는 신앙(욥30:1-15) 찬455장
욥은 자기 친구들의 상황과 자신을 비교함으로 탄식합니다. 친구들의 아비는 자기의 경건만 못하며 그들의 경건 역시 욥에게 아무 도움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처지는 풀리지 않고 고생 구덩이에 떨어져있습니다. 이 때 욥은 하나님의 섭리의 손을 붙잡으며 하나님을 겸손히 바라보았습니다. 어떻게 나타나 있습니까?
첫째, 11절에서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괴롭힘을 토로했습니다. 연단을 거친 정금 같은 욥의 신앙은 수천 년이 지난 후 신약교회의 경건의 모델이며 경건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허다한 증인에게 둘러싸인 복된 자였습니다. 둘째, 친구들의 무자비한 공격을 당해도 하나님 섭리의 범위 안에 들어있음을 믿었습니다(1-11). 성을 파괴하고 군사들이 몰려오는 극한 상황에서도 자기 본분을 잘 지킴으로 하나님의 보호의 호주머니 속에서 참 위로를 받았습니다. 섭리의 신앙에 참 위로가 있습니다.
환난이 주는 복 (욥30:16-30) 찬383장
욥이 당한 환난을 열거하는 본문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첫째, 소망이 모두 무너진 상태(1), 뼈가 쑤시는 육체의 고통(2), 환자복 처럼 누추함(3) 그리고 티끌과 재에 앉아 기진맥진한 자리에 있었지만(4) 인생은 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배운 것이 복이었습니다.
둘째, 기도 응답이 없어 바람에 휘날리는 영적 방황, 검은 가죽과 열기로 타는 뼈만 남았습니다. 자신은 불쌍한 자를 도와주었건만 하나님이 재앙을 허락하신 사실로 탄식하며 애곡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주권대로 되는 전적 무능을 깨닫는 것이 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고난의 순간에도 그를 헛되이 다루지 않으셨고 그의 자상한 사랑의 손길로 정금처럼 빚어 가셨습니다.
마음이 정결한 삶 (욥31:1-23) 찬202장
본문에 또 다시 나타난 욥의 삶은 얼마나 정결했습니까?
첫째, 그의 개인적 삶이 정결했습니다. 눈과 언약을 세워 허탄과 궤휼이 없었으며 공평한 저울로 자기 걸음과 마음과 손을 깨끗이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자극성이 있는 죄악을 이겼습니다. 여인에게 유혹된 적이 없었습니다(9) . 둘째, 소자를 적극적으로 돌아보았습니다. 남종과 여종의 사정을 듣고 가난한 자의 소원을 들어 주었으며 부모처럼 고아와 과부를 돌보았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풀었고 고아를 적극적으로 후대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재앙을 두려워했습니다. 이런 경건의 생활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가 당한 고난을 통해 욥은 하나님을 더욱 더 두려워했습니다. 이 경외심이 욥을 정결하게 만든 것입니다. 마음이 정결한 자가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을 보는 자만이 정결한 마음을 갖습니다(마5:8).
욥의 의의 수준(욥31:24-40) 찬 265장
욥은 과거의 부요를 회상하며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는 어떤 순전함이 있었습니까?
첫째, 물질주의를 극복했으며 우상숭배를 금지했으며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원할 정도로 악을 싫어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하인들에게까지 그의 순전을 인정받았습니다. 둘째, 나그네를 대접하며 큰 무리를 향해 의를 주장했습니다. 소송자가 없을 정도로 걸음마다 의로 가득 찼습니다. 농경사회의 일터인 밭도 그의 의를 안다고 할 정도로 의의 사람이었습니다.
마치 사도행전 20장에 나온 바울의 삶을 생각하게 합니다. 탐욕주의를 경계하고, 이타주의의 삶을 살았으며, 모든 면에 일절 깨끗했습니다. 머리 둘 곳이 없으셨던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이면서 동시에 원수를 사랑하는 높은 수준으로 사셨기에 누구에게든지 허물을 찾으라고 도전할 수 있으셨습니다. 욥을 순전하게 만든 고난이 우리도 그렇게 만들 수 있습니다.
밤중에 노래하자(욥34:31-35:16) 찬43장
역사 속의 교회는 무수한 고난의 밤을 맞습니다. 영국의 퓨리탄, 프랑스의 위그노, 화란의 거지들 그리고 한국의 신사참배에 맞선 옥중 성도들은 모두 밤에 노래한 사람들입니다. 역대기서와 열왕기서의 역사도 세상 역사와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난 중의 노래한 자들을 통해 그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욥에 대한 엘리후의 말대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영혼의 밤, 건강의 밤, 시대의 밤, 환경의 밤에서도 말씀과 기도를 잊지 않는 사람은 노래하게 됩니다. 빌립보 감옥의 바울과 실라도 고난의 자리에서 찬미할 때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육체에 기적이 없어도 먼저 찬미할 때 영혼의 구원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도가 겪는 칠흑 같은 많은 밤은 값진 진리와 기도를 배울 수 있기에 정말 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