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사 시절, 중고등부 학생들을 데리고 경기도 양평의 갈운리의 한 기도원에 수양회 간 일이 있었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비는 때라, 가기 전 중고등부 학생들에게 방과 후 매일 교회에 모여 40일간 기도를 하게 했다. 정한 날, 버스 두 대에 나누어 콩나물 싣듯이 싣고 갔는데 그 날 밤부터 우리는 이상한 영적 분위기에 사로잡혔다. 잠잘 줄 모르고 기도하며 부르짖는 소리가 골짜기를 메웠다. 집회 둘째 날 예배를 마치고 나자 학생들은 은혜 받기 위하여 기도하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나 역시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고 기대하면서도 반신반의 했다. 정말 그들의 마음은 회개와 통회자복으로 이어져 밥 먹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일이 있은 후, 교회는 온통 기도의 불이 타올랐다. 그 분위기 속에서 자란 학생들 중 목사가 된 사람도 있다. 지금도 나는 그 사건을 내 마음에 도장을 새기듯이 간직하고 있다. 정말 이런 것이라면 자꾸 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 때 내가 한 일은 하나님 말씀을 강의식으로 설교한 일밖에 없었다. 그때 내가 배운 것은 사람을 바꾸는 능력이 성경에 있다는 사실이다.
요시야 개혁운동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어지러운 시대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성전 수리부터 시작했다. 거기서 율법 두루마리를 발견한다. 한 제사장이 그것을 읽을 때 요시야는 현재의 저주가 죄 때문인 줄을 알고 자신이 먼저 베옷을 입고 회개하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온 백성에게 이 책을 듣게 하고 무너진 언약을 다시 체결시켰다. 그 부흥은 말씀의 부흥이다. 말씀의 부흥은 말씀을 들을 때부터 판가름된다. 말씀을 읽었는데도 열린 심령을 가지고 임할 때 역사가 일어났다. 이 사모심이 오늘날 요구된다.
너무 값싼 분위기 조성의 부흥, 의지와 지성에까지 전달되지 않는 피상적 개혁운동은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 또 다른 외식을 만들기 때문이다. “부흥”이라는 복음송 가사 대로 진정한 부흥이 일어났는지를 물어보아야한다. “열린 예배”라는 붐이 교회마다 일어난다. 세대의 격차를 줄이면서 복음을 알리자는 것이다. 21세기 모호한 문화 흐름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한 대안이다. 그러나 진정 요시야의 부흥 요소가 거기 있는가라고 물어보아야 한다. 분위기나 감정에 치우친 피상적 부흥은 어디나 있어지는 것이고 앞으로도 많아질 것이다. 진정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요시야의 열린 마음이다. 말씀을 듣기만 했는데도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책임진 자세가 요구된다. 이런 부흥, 이런 개혁이 오늘날 일어나야 한다. 내가 먼저이지 분위기가 먼저가 아니다. 장소나 방법이 어떻든, 흙바닥이든, 얼어붙은 김치를 먹든, 새우잠을 자는 방이든, 상관없이 마음이 하나님 말씀에 열리는가가 중요하다. 이것을 피하는 교묘한 수법에 우리 육(부패한 인간성)은 아주 숙달되어있다. 있는 거기서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들음으로 내 속에서부터 이 부흥을 맛보자. 뜬 구름 잡는 부흥은 지나간 것으로 족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