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야의 개혁

16세기 말엽내지 17세기 초엽 영국 퓨리탄들은 개혁을 “갱신(renewal)”, “부흥(revival)”이란 말로 사용했다. 이것은 교회의 개혁이란 세상적 용어가 아니라 성경적 용어임을 보인다. 개혁은 주님이 요구하는 것임을 알아 성경에서 그 샘풀을 찾아야한다. 요시야 왕의 개혁(대하 34:-35:)에서 우리는 주님이 원하는 진정한 개혁의 모습을 본다. 어떤 요소가 발견되는가?

첫째 요시야 개혁은 성경으로 시작되었다.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는 것이 개혁은 아니다. 이 율법을 읽고 들음으로 그 말씀이 마음에 접촉하는 데서 개혁이 시작되었다. 말씀으로 시작한 개혁이란 말이다. 이 말은 그 개혁의 시작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게 있다는 말이다. 내가 개혁은 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개혁하는 도구로서 나를 쓰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혁의 첫걸음으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부흥, 개혁을 구하는 자는 성경 읽는 것부터 시작하시라. 거기에 개혁의 주체자이신 성령이 불을 준비하고 기다리신다.

둘째, 요시야 개혁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결단에서 진행되었다. 말씀을 듣기만하는 자가 아니라 듣고 순종하여 행동으로 옮겼다. 그 동안 전 이스라엘을 뒤 덮은 우상들, 심지어 성전을 가득 채운 아세라 상, 바알 상을 모두 끌어내 불태워버렸다. 용기있게 행동화한 것이다. 간혹 우리는 주변 우상만을 바라보기 쉽다. 그러나 우리 속에 놓인 우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져 야한다. 물량주의, 기복주의, 안일주의는 여전히 우리 속에 있는 우상이다. 불태워 버리고 버려야할 우상이다. 이런 일은 오직 하나님의 진노의 손을 바라보는 자만이 할 수 있다.

셋째로 개혁의 결과는 더 중요하였다. 요시야가 그렇게 위대한 개혁을 이 루었지만 므낫새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타오르는 진노를 막을 수가 없었다. 도리어 그는 므깃도에서 애굽 왕과의 싸움에서 전사한다. 개혁을 이룬 왕이요 성령의 쓰임 받은 왕인데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우리는 여기서 개혁의 시작이 하나님이며 개혁의 마지막도 하나님의 손이심을 알고 겸손히 주권의 손을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한다. 바울처럼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고백이 우리의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부흥이 되고 개혁이 되었다하여 그 뒤에 자기의 탐욕, 자기 이름, 자기 안일을 숨겨놓았다면 성경적 개혁은 아니다. 루터의 개혁도 귀하였지만 칼빈의 개혁은 더 귀하다고 역사가 평가하는 것은 그가 개혁의 시작과 결과에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영광을 돌렸다는 데 있다. 말씀으로 시작하는 개혁, 말씀화로 삶의 현장에 옮기 는 용단, 그리고 그 열매를 맛보는 자아부인의 길을 걷는 개혁을 우리는 구한다. 이런 진정한 개혁, 부흥, 갱신을 우리 시대의 교회가 정말 갈망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