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영생이란 “영원히 사는 생명”으로 통하나 신자들은 더 근원적인 정의를 알고 있다. 영생은 하나님 뿐이고 예수님 뿐이고 성령님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신지식이 영생이다.(요17:3)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 아는 것”이란 구절만 나오면 먼저 영생과 관련지어 생각해야한다. 영생하면 아래 세 가지가 분명해야 한다.
첫째, 예수께서 친히 자신이 영생이고 자신의 말이 영생이고 아버지의 명령이 영생이 라고 주장하셨다.(요12:50) 성경의 모든 말씀, 낱낱의 말씀(every word)이 다 영생이라는 선언이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영생 얻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말씀 하셨고, 기록된 성경 말씀을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를 살피는 행위를 신사적 성품 (행17:11)으로 바울은 정의했다. 참 사람다움은 외적 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 성품의 아름다움에 있다면 그 아름다움이 성경을 상고할 때 형성된다. 어두움 사람이 밝은 사람으로,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으로, 고질적 질고로 일그러진 마음이 완전한 치료로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영생의 말씀을 접한 자의 경험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상고하는 신자는 행복하다. 오늘이라는 날에 어떤 아름다움 이 내 속에서 빚어질지를 기대하며 맛보며 살기 때문이다. 어제 못난 성격이 오늘 성령의 역사로 아름다운 성품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조건은 영생의 원천인 성경을 충실하게 대할 때 되는 것이다.
둘째 이 영생의 삶은 빛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을 세상의 빛, 생명의 빛이라고 하며 그 안에 거하는 자는 생명의 빛 안에 거한다는 비유는 그 바탕에 영생을 가진 삶은 빛의 생활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먹장 구름 같은 마음의 흑암이 사라지고 안개같이 혼미한 생각, 감정이 신령한 것으로 바꾸어진다. 그러기에 그는 생명의 빛이 무엇임을 맛본다. 119편의 시편 저자는 이 빛을 알았기에 “주의 말씀은 내 길의 빛이요 내 발의 등불” 이 라고 했다. 칠흙같이 어두운 시대를 살아도 그 빛을 가지면 밝아진다. 길이 보이고 지혜가 생기고 소망이 생긴다. 16세기 말, 청교도들은 오늘에 비하면 얼마나 낙후된 문명에 살았는가? 성경 때문에 자기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살아간 그들 속에는 21세기 현대인이 알지 못하는 빛이 있었다. 감옥에 갇혀 평생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목회한 사무엘 루터포드는 스코틀랜드 한 감방에서도 천당의 빛 속에 살았다. 조국의 전쟁 위협과 미국의 불경기로 어두움 속에 있는 우리도 영생의 말씀을 붙든다 면 반드시 밝음이 생긴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의 낙심된 마음이 소망으로 나타난 것처럼 성경을 상고하면 반드시 그 맛을 알게 된다. 이것이 영생의 빛 가운데 거하는 삶이다.
셋째, 이 영생은 선한 양심의 삶을 살게 한다. 굳이 양심은 우리 속에 보낸 하나님 의 스파이라는 말이 아닐지라도 거듭난 양심은 모든 판단기준이 자기 양심임을 인정 한다. 성경이 일차기준이라면 그 다음은 자기의 선한 양심이다. 선악은 그 자신이 더 잘 안 다, 그래서 성도는 선한 양심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 양심을 통해 성령이 일하신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의 선한 양심을 지켜 더럽혀지지 않도록 항상 진실되이 살려 한다. 영생의 삶이란 선한 양심을 따르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