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은 제자가운데 가장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다. 그들 모두가 개인역사를 가지나 시몬만은 기록이 없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는 열심당이란 평판을 가진 사람으로서 제자의 그룹에 속했다. 그는 오늘날 로마인들이 테러리스트라 하는 로마의 저항 세력과 관련된 인물로 나타난다. 얼마나 놀랍고 복잡한가? 어부와 일꾼들에 이어 예수님은 마태와 시몬 정반대의 두 사람을 선택하셨다. 세리로서 원수인 로마 하수인인 마태와 공역하고 있었다. 열심당 가나안인 시몬은 분노를 나타내고 로마를 대항하는 그들의 노력에고 불구하고 자 국민조차 죽이려 는 유대인들에게 실망했었다. 예수를 따르는 시몬의 본래 동기는 복합적인 것 같다. 예수의 기적과 방법이 거세지 않았고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갔다. 아마 시몬이 다른 제자들이 이렇게 저렇게 느낀대로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도하고 로마를 선도하지 않는 점을 느꼈을 것이다.
복음 기자들은 시몬 자리에 다른 것을 기록하였기에 복음서에 그의 말이나 활동이 나타나지 않는다. 겉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제자들 가운데서 조차도 초점이 되는 것을 피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지켜 보며 배우다가 점차 변화되었다. 흥미롭게도 예수를 잡으러 오는 군사들을 저지하는 모든 제자들의 방패가 된 사람은 시몬이 가장 분명한 후보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충동적인 어부 베드로가 원수를 검으로 내리쳤다.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은 그 길을 따른 사도들과 집사들의 공헌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주로 베드로와 바울의 사역에 초점을 맞춘다. 다른 사도들의 여행과 활동의 증거에 관한 우리의 증거는 일차적으로 전통에서 온 것이다. 우리가 아는대로 기독교는 1세기에 산불처럼 번져나갔다. 어떤 이는 강요하는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했다. 우리가 아는대로 팍스 로마나(로마제국을 통제하고 기반이 된 평화)가 그 시대의 표준이기에 여행을 폭 넓고 쉽게 할 수 있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선교에 수천마일을 여행했다. 왜 다른 사도들은 그러지 못했는가? 시몬의 선교 여행에 관한 전통적 견해는 별로 그의 여행 방법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그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남서쪽으로 가며 북부아프리카의 광활한 땅을 가로질러 에집트, 리비아 그리고 뮤리타니아를 가로질러 스페인과 지금 브리티쉬 섬까지 나아갔다. 이 모든 행보가 로마제국의 영역 안에 들어있었다. 칼타고와 알렉산드리아 같은 먼 지역의 기독교 공동체의 성장은 그와 관련된다.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에 일어난 광대한 국제적 복음전도 부흥은 하나님의 성령이 선교지역과 사도들의 최상적 양육을 준비시킨 것이 기독교 확장과 활기찬 전파를 부분적이나 가장 잘 설명해 준다. 고려되는 다른 요소는 예루살렘에서 양 사방으로 흩어진 유대인의 박해이다. 만일 바울의 접근이 우리에게 어떤 실마리를 준다면 흩어진 위치에서 유대인 공회는 복음 전초기지가 되었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오래 기다리던 메시야가 왔다는 복음을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그 후 우리는 유다와 함께 예루살렘의 북동쪽으로 전도하여 중동으로 돌아가 먼 페르시아까지 복음을 전한 시몬을 생각할 수 있다. 오랜 전통은 시몬이 톱으로 두 동강으로 잘리워 순교했다는 세밀한 고난 이야기를 말해준다.
“믿음의 모델(the roll -call of faith)”로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박해의 생생한 묘사는 저자 마음에 최근 순교자들의 충분한 모델들을 보여준다. 이 여러 구절은 예수 제자들이 맛본 고난에 관한 정확한 샘플을 보인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히11:35-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