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하는 말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며 기도하는 이유는 그들 속에 말씀이 역사하였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전서 2:13-20절에 사도와 그들의 성경관이 분명하게 보여진다. 성경을 단지 사람이 전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으로 받았다는 것이다. 이 성경관은 예수님의 성경관 자체이고 개혁주의자들이 계속 지켜 온 성경관이다. “내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요6:63)”는 주님의 성경관은 성경의 생명성(vitality)을 강조한다. 지금 하늘에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음성으로 받으려는 개혁주의자의 자세는 성경의 생명성을 인정하는 전제에서 이루어진 태도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연약한 인간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이 신비스러운 일이다. 인간이 하니님의 말씀을 말한다는 사실은 신비스러운 일이다. 신적 언어를 인적 언어로 바꾸어 이해하는 것은 성령의 기적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마치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각종 방언을 말할 때 듣는 각 나라의 개종자들이 자기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처럼 성령이 사도의 발설이나 청중의 귀에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신비스러운 역사이다. 성경을 풀어줄 때 인간이 그 말을 관찰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나 듣는 사람이 자기 지각으로 받아들일 때 성령은 임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하심은 정말 신비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으로 듣는 실감 있는 태도와 반응이 일어나는 것은 그 자체가 은혜이다. 이 성경의 생명성에 관한 확신은 오늘날 교회에도 항상 확인되어야 한다. 데살로니가 교우들의 성경에 대한 태도를 통해 무엇을 배울까?

첫째,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점이다. 분명 사람의 말인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자세는 마음의 변화 없이 불가능하다. 하나님과 그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만이 알 수 있는 태도이다. 앞서 빌립보 성의 핍박을 피해 도망 온 데살로니가 회당에서 성경을 3주간강론할 때 그 긴장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세가 생긴 것이 은혜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 태도를 가리켜 맞장구치기를 진실로 그러하다고 했다. 사도의 성경관은 사람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은 신비 중 신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행위로서의 설교를 대할 때 이런 태도가 반드시 요구된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는 그 마음에 성령은 일하신다.

둘째, 말씀을 순종했다는 점이다. 순종이란 말씀을 내게 적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본문에 나의 관점에서 그 진리가 내게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생각하는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을 지스펙(G- God, S- Sin, P- Promise, E- Example, C- Command))을 적용하여 내가 구체적으로 할 일을 찾는 것이다. 내가 빠진 적용은 순종이 아니다. 진리의 정보만 남겨두지 말고 내 것으로 먹어 유익을 보아야한다. 예를 들면, 한 혈루증 여인처럼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면 나으리라는 믿음으로 만질 때 즉시 나은 것처럼 오늘 말씀의 옷자락에 믿음을 화합해야한다. 그 때 주의 능력이 나타난다. 그래서 사도는 말씀이 믿는 자 속에 역사하는 것을 보았다. 말씀은 순종하기 전까지 그 실상을 알기 어렵다. 순종한 하인만이 알게 된다.

셋째, 말씀의 세계가 열렸다. 복음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그 속에 들어가 그 풍성한 평원을 보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 중심한 만유, 신자의 생애의 목적 그리고 교회의 유기성은 모두 말씀의 세계에서 알려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66권의 각 성경의 세계를 열어 그 속에 펼쳐진 은혜의 강수와 진리의 산맥을 볼 수 있어야하고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사자들의 왕래를 볼 수 있어야한다.(요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