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절기, 우리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에덴의 회복을 본다. 갈보리는 에덴 회복의 문을 여는 새벽이다. 에덴에서 문이 닫히는 것을 본 우리는 갈보리에서 그 문이 다시 열리는 것을 본다.
에덴에서 사망이 지배하는 어두움을 안 우리는 갈보리에서 그 사망이 어떻게 죽어 부활의 광명이 어떠한가를 본다. 에덴에서 우리는 생명나무를 잃지만 갈보리에서 우리는 생명나무를 따 먹는 교회를 본다. 에덴에서 하나님과 원수 되어 마귀와 하나 된 저주의 시작을 본 우리는 갈보리에서 그의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하나님과 연합된 교회를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활 사건은 기독교의 기초이며 한 신자의 새 삶의 시작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살아나 생명을 얻으며, 그것으로 우리는 위대한 꿈을 꾼다. 부활의 현장에 구약의 데오파니(Theophany 현현)의 영광이 나타났고 온전한 세키나(임재)의 영광이 나타난다. 주님이 친히 강림하셨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처럼 제한된 범위에만 주어지던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와 그의 빈 무덤에서는 완성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광경을 본 여인들은 너무 놀라워 두려워하여 모두 침묵한다.(막16:8) 빈 무덤 속에 임하신 하나님 임재의 영광을 접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 영광을 보는 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교회며 그리스도인이다. 부활증인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은 이것이 자기 생애에 가장 큰 사건임을 알기 때문이며 인류의 생존 문제가 거기에 달려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살았고, 이것 때문에 의를 찾았고, 이것 때문에 우리는 가치를 발견한다. 그러므로 바울 처럼 우리도 날마다 죽을 수가 있고 더 많은 수고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전적 무력과 함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기에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임을 깨닫는다.
점점 어두워가는 현실을 사는 우리 가슴이 갈보리 십자가로 시작하게 하라. 십자가에서 공급되는 부활의 능력을 받아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확신을 표어로 삼고 부활의 영의 인도를 따라서 어두운 현실에서 부활의 강력을 나타내는 성도로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