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족장들도 신약의 구속의 소망이 있었는가? 부활에 대한 소망이 그들에게도 있었는가?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그리스도인들의 그것과 동질의 것인가? 이런 물음을 품고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한 믿음과 동일한 사랑과 동일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음이 증명된다. 단지, 그들은 그림자요 예표적이라면 신약의 그들은 사실적이요 완성적이었다. 왜냐하면 야곱과 요셉의 죽음 앞에서 부활의 소망을 기약하는 모습 을 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부활 소망은 주님과 함께있는 임마누엘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14-18절에 보면 주님이 재림하실 때,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살아 있는 자들이 공중에 끌어올려져 주와 함께 영원히 있음을 말한다. 임마누엘의 복이 모든 축복의 결정체요 결론이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임재의식은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체험이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시리라는 것으로 교회에 복을 주셨다. 이 세상 순례가 다 끝난 다음에 펼쳐지는 세계는 여전히 주님과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상태이다.
족장 시대에도 여전히 이 임마누엘의 복이 진정한 복임을 분명히 보인다. 아브라함도 물질이 많고 명예가 올라가고 이민생활의 안녕을 보장받는 것을 복의 내용으로 보지 않고 어디서나 주님이 함께 하심 곧, 임마누엘 상태가 바로 복임을 믿었다. 그 말은 그의 마음에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과 같이 동일한 부활 생명을 지니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가 모리아 제단에서 이삭을 드릴 때 그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으로 믿었던 것은 그의 마음에 믿음으로 얻은 부활의 소망을 확신한 셈이다. 야곱도 그의 말년에 도달한 지점이 바로 부활 생명을 가진 자의 소망가운데 죽었다. 약속의 땅에 묻히기를 원한 것이다. 요셉 역시 하나님의 약속이 장래에 이루어져 하나님의 권고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날 것을 내다보았다. 이것은 부활생명이 그들 속에 있는 증거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나타난 이 표현들은 부활 소망이 이미 구약시대에도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는 동일한 성령의 역사가 예전이나 지금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분명히 일하셨음을 보인 것이다.
신약의 완성된 빛 아래 사는 우리들은 이런 부활의 소망이 늘 넘쳐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요구하는 정상적 그리스도인의 상태이다. 고난당하는 환경일지라도 이 부활의 강력으로 살아갈 수 있고 문제가 있는 상황도 이 부활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가슴에 이 부활 생명의 능력, 곧 임마누엘의 맛을 누리지 못한다면 신속한 세상에서 제 구실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복의 노란자위인 임마누엘의 복을 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