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한 싸움

신령한 자란 하나님과 영혼의 관계가 원만한 사람을 가리킨다.(고전3:1) 성령을 모신 신자는 모두 신령한 사람의 반열에 이미 들어와 있다. 삶의 질과 열매는 차이가 있으나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한 것만으로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인 영생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신령한 자가 되었기에 신령한 싸움을 싸우라고 명한다. 어떤 싸움인가?

첫째, 그 싸움은 육체 소욕과의 싸움이다. 거듭날 때 우리의 모든 죄와 죄책과 형벌 그리고 육체의 소욕이 모두 십자가 위에서 처단되었다 할지라도 완성된 구원에 이르기까지 육체 소욕의 능력은 여전히 남아있다. 가나안 칠 족속처럼 우리 속에서 활동하여 기회만 되면 우리로 죄를 짓도록 이끈다. 그래서 바울은 선을 행하려는 자기의 선한 의욕을 순간에 무너뜨리는 육체의 소욕을 바라보고 “오호로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고 탄식하였다. 그리고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지 못하고 잠에 취한 제자들을 향하여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하셨다. 이것은 육체가 피곤하다는 동정의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따르지 못하는 그들 속의 육체의 소욕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육체의 소욕은 항상 성령의 뜻을 거스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흉이다. 갈라다아 교우들을 권면할 때 이신칭의의 진리를 강조한 사도는 마침내 거짓 교훈을 좋아하는 부패성을 죽이는 것이 우리 싸움의 목표임을 제시한 바 있다. 이 육은 마귀와 세상보다 더 골치아픈 원수인 이유가 우리 속에 그 힘을 계속 행사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 정과 욕심을 처단한 것이 명백한 사실일지라도 그리스도인의 실제 생활에 그 권세는 그대로 남아 있기에 믿음으로 그것과 싸우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둘째, 그 싸움은 소극적인 요구에서 더 적극적인 명령으로 나타난 것이 성령을 좇는 것이다. 믿음이냐 행함이냐는 성령이냐 육체냐의 싸움으로 집약된다. 신령한 싸움의 최접전지는 바로 육체의 소욕을 죽이고 성령을 좇는 마음에 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을 좇아 성령의 열매를 맺히라고 명한다. 만일 이 싸움에 실패하면 자연히 육신의 열매를 맺히게 된다고 경고하기에 언제 어디서나 성령 좇는 일에 성실하라고 강권한다. 성령으로 새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내주하심을 주장하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그의 열매를 나타내어야 한다. 그 열매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열매인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요약된다. (롬 14:17) 아무리 시대 풍조가 갈려도 성령을 쫓는 일은 변함이 없다. 이것이 항상 우리 속에, 우리 밖에 그리고 우리 관계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성령의 자상한 인도로 완성될 우리의 구원을 구체적으로 이루기 위하여 이 신령한 싸움에 성실하게 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