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산에서 원수에게 넘겨지는 그 짧은 순간에 주님은 어떻게 자기 십자가를 지셨나? 순간에 영적 순발력에 둔치인 우리에게 어떤 본을 보이셨나?(막14:43-52) 첫째, 검과 몽치를 가진 군병에게 잡히심에도 십자가 길을 택하셨다. 정치적 권력을 동원하여 강도를 잡는 것처럼 무장하고 주님을 찾았다. 12사단의 천사 동원령을 발동하실 수 있으신 전능자께서 보잘 것 없는 무력 앞에 잡히심은 십자가 지시는 모습이다.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능력 행사를 포기하심으로 그 길을 가신 셈이다. 니므롯의 무력이 공격하는 자리에서도 십자가를 질줄 알아야한다. 돈, 명예, 권력 앞에서도 주님을 바라봄으로 참고 십자가를 지자 주님께서 털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양처럼 그대로 당하셨기 때문이다.
둘째, 가롯 유다의 배반의 입맞춤에도 자기 십자가를 지셨다. 무력과 계교는 서로 결탁하여 주님을 공격했다. 사제지간의 배신의 칼을 받고서도 주님은 참으셨다. 유다가 군호를 짜고 단단히 잡으라는 말을 한 것을 보면 이미 작당한 것이 분명하다. 철저한 의도적 계획적 배반이었으나 주님은 그 보다 앞서 더 잘 아셨다. 베드로의 어리석은 인간적 도움까지도 너무나 잘 아셨다. 입살롬이 아버지 디윗을 배반한 것처럼 철저한 배신을 당하셨을 때 주님은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장차 교회의 대적도 가까이 있는 적 그리스도의 배교로 찾아온다. 이것을 미리 알고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항상 준비해야한다. 가까이 있는 자일수록 진리에 서기를 기뻐해야한다. 주님의 진리를 따르지 않으면 주님을 배반하는 자로 둔갑할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셋째, 성경을 이루시려는 목표에 집중하심으로 십자가를 지셨다. 그 와중에서도 주님의 관심은 무엇이었는가? 성경을 성취하려는 것이다. 주님의 관심이 여기서만 이 아니고 기적을 행할 때나 원수를 대항할 때나 십자가를 지실 때에나 고통 중에서도 온통 성경성취에 있음은 정말 기이한 일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최상으로 표현한 계시로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을 이루시려고 주님이 오셨다. 정말 주님은 의지 지성 감정의 작은 움직임 하나까지도 성경 성취를 위하여 총 집중하셨다. 그 혼란 중에서도 성경을 성취하려는 목표는 부활하신 후에도 계속되었다. 교회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성경이 무엇 이길래 그러는가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은 성경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다. 성경을 사랑함이 십자가 지는 구체적인 행동이고, 성경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성경적 태도를 갖고, 성경과 함께 살다가 죽는 것이 십자가 지는 삶의 구체적인 적용이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성경의 길이고 성경의 길이 십자가 지는 길이다.
육의 날까로운 비수의 공격을 당했다 할지라도 십자가의 길을 가신 주님을 묵상하라. 이것은 피를 흘리기까지 싸워야하고 참아야 한다. 혈육을 사용하는 충동과 자극을 받을 때 참아야 한다. 성경을 사랑하는 목표로 살아가라. 이것이 사는 길이다. 정말 주를 따르려면 주님의 본을 따라 자기 십자가를 져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