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노동과 수고와 피 땀의 각고를 은혜로 생각지 않는다. 성경은 도리어 수고와 노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중요한 방법으로 보고 있다. 은혜를 받고 예정과 택정을 받았다면 무슨 수고와 노력이 필요한가라고 말하며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운명론 내지 신비주의를 경계한다. 이것은 진리에 이른 것이 아니고 진리를 잘 알지 못하여 치우친 삶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은 수고를 한다고 말한다. (고전15:10) 이것이 바로 노동이 은혜이지 죄악의 결과로 나타난 저주가 아니라는 하나의 증거이다.
타락이후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벌로서 고통을 주신 것이지 수고와 노력과 노동은 선물로 그대로 남겨두셨다.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사명은 취소되지 않았다. 이런 발견은 정상적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은혜 받은 자라하여 먹고 마시는 생활에 구시대 사람처럼 적극적이지 못하거나 반 지식주의나 반 과학주의로 치우치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도하면 모든 것이 다 된다고 하여 일하지 않는다면 그는 굶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여 문화적 생활 사역을 등한히 여기는 자는 빈궁 할 수밖에 없다. 도리어 우리는 경건 활동 못지않게 세상에 대한 문화 변혁자로서 살아가야한다. 우리는 공부도 잘해야 되고 돈도 잘 벌어야한다. 경건 우선순위에는 변화가 없지만 일상생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경건의 능력을 힘써 나타내야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하는 바를 다 잘 아시지만 강청하는 기도를 드릴 때 기뻐하셨다. 피땀 흘려 드리는 기도와 무릎을 꿇고 매어달려 드리는 열정적 기도를 매우 좋아하신다.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15:28)고 말씀하심은 노동과 수고가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는 수단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므로 내 힘으로 이런 수고를 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에 보태기 식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인간은 무조건적으로 구원을 받을 뿐이기 때문이다.(엡2:8-9)
노동의 은총을 존귀하게 여기는 풍토가 우리의 삶에 일어나야 한다. 가정생활은 물론 직장과 사회활동 그리고 경건의 활동무대인 문화사역에서 위대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수 있어야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갈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