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판결

빌라도 법정은 세기의 판결이 일어난 장소이다. 죽음의 선고를 받은 아담의 모든 저주를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가 대신 받으심으로써 모든 형벌에 마침표를 찍으셨다. 마치 자기 백성이 그의 머리에 안수하여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우는 순간이다. 그 때 주님은 털 깍는 자 앞의 잠잠한 양과 같았다. 빌라도 법정에서 주님은 어떤 상황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셨나?

첫째, 빌라도의 우유부단한 태도를 견디셨다.(막15:1-2) 그의 정치 탐욕에서 나온 우유부단한 능글능글한 태도는 가시로 찌르는 괴로움이다. 죄 없는 자를 죄인으로 만드는 일에 동참하고 도장을 쳐야하는 재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질문에 “네가 옳도다”고 간단히 대답하셨다. 또 “네 백성이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 것을 보라”고 하자 침묵하셨다. 그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는 꿈을 꾼 아내의 조언은 그가 바른 길을 택할 기회이며 무딘 양심을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그는 얼마나 우유부단했던가? 그 때 주님은 침묵하심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셨다. 진리 편에 서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태도를 대할 때 불평과 비난 보다 책임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진리의 편에 서는 중대한 결단(단1:8)을 내려야한다.

둘째, 몰지각한 군중의 무지를 견디셨다. (막15:11-14) 군중의 무지가 바산의 힘센 소 같은 무게로 그를 눌렀다. 무식하고 무모하고 무자비한 군중이다. 대제사장의 사주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다. 빌라도는 무리의 만족을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넘겨준다. 그런 무지한 세력 앞에서 주님은 어떻게 자기 십자가를 지셨나? 주님은 침묵하셨다. 이제 군병의 칼과 몽치가 군중에게 들려진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가 주님을 죽였다. 그들은 바벨탑 쌓는 군중으로 어느 누구하나 담대함으로 진리를 외칠 수가 없었다. 실로암 못가의 기적을 체험한 한 소경의 부모처럼 출교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무지한 사람들의 공격을 당할 때 자기 십자가의 길을 가야만 한다. 좁은 길을 갈 때 자주 일어나는 이런 요청 앞에 우리는 거기에 편성하지 말고 주님 편에 서야한다. 도마처럼 주와 함께 죽으러 가야한다.

셋째, 강도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심에도 자신을 내주셨다.(막15:15) 강도보다 못한 대우는 강도보다 더 악하다는 뜻이다. 긍휼을 베푸시고도 이런 대우를 받으심은 억울한 일이다. 이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못한다. 주를 생각함으로 참으라고 했다. 이때 주님은 아사셀 양처럼 자신을 준비하셨다. 스데반의 순교는 이것의 복사판이다. 수많은 수고를 하고서도 버림받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주님의 침묵하심을 따라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는 모든 일에 주님을 기쁘시게 할 목표로 살아가야한다. 먹으나 마시나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할 때 주님이 갚아주신다.

가야바 법정에서의 십자가 지시는 본을 따라 우유부단한 태도의 공격, 무지한 세력과 강도보다 못한 대우에도 침묵으로 이기신 주님, 이것은 자기 백성을 구하기 위한 고난이었다. 모든 줗은 일은 이런 자를 통해서 나타난다. 어느 것 하나라도 자기 욕구를 그대로 택했더라면 수포로 돌아간다. 주님을 만족시키기 위해 살아가자. 이것이 자기 십자가 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