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과 신약에는 건물을 성전이라 했다. 성전은 예수님이고 그를 영접한 그리스도인의 마음이라 했다. 칼빈이 말한대로 성전은 건물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 성전인가? 하나님 거하시는 곳이 성전이다. 보좌가 성전이고 제단이 성전이다. 그 분이 임재하신 곳이 성전이다. 야곱은 벧엘에서 성전을 체험하기를 “하나님이 여기계셨군요”라고 고백한다. 그는 건물 성전을 세우겠다고 서원한다. 내용 성전이 건물 성전보다 앞선다. 성령세례가 물세례보다 앞서는 것과 같다. 이것은 교회당을 교회로 생각하는 것으로 움직이는 모든 크리스챤의 사고에 쐐기를 박는 말이다. 교회는 사람이고 건물이 아니다. 시간과 장소가 어찌하든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 교회이다. 셋집에서 모이든 빌딩에 모이든 들판에 모이든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면 그곳에 주님이 함께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성전의 중심이고 생명이다. 성막을 떠난 이스라엘은 버림받은 무리이며 성전이 무너진 통일왕국은 멸망한 나라로서 아무 소망을 갖지 못한다. 성전은 하나님의 현현, 임재 그리고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막을 완성할 때도 영광의 구름이 충만했고 성전을 완공하고도 영광이 가득찼고 최초의 실제적 교회인 마가 다락방에 성령의 임재가 충만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거기에 권위가 있고 전체를 관장하는 통치권이 존재한다.
성전의 내용이 있을 때 성전건물이 빛나지만 빛나는 건물이 성전의 실재에 영향을 조금도 미칠 수가 없다. 만일 건물의 아름다움이나 모임의 정돈된 모습이 경건의 영향을 미친다면 이것은 세상임을 증거하며 이미 성전이 아니다. 주객이 바꾸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제한된 공간과 시간 속에 모여 예배하며 기도하기를 원하여 성전을 지으라고 하셨다. 솔로몬이 이해한 성전은 하나님 백성이 실패하거나 징계를 받아 나그네가 되거나 기근과 병충해와 전염병으로 죄절된 상태에 있거나 남의 나라의 포로가 되어 피리를 불며 외로움을 달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할지라도 그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 응답하심을 믿었다. 그때 회개하고 인정하고 손을 들고 돌이켜 찬양하고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보좌에서 응답하는 것으로 약속하셨다. 그래서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 동쪽 창을 열어놓고 기도하여 은혜를 경험한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어디에 있든지 주님을 향하여 회개하고 부르짖으면 응답하신다.
구원받아 성전된 신자가 마음을 잘 지키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생명의 근원이 여기서 나오기 때문이다. 항상 기도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기도에 힘쓸 때 성령은 이미 성전에서 드린 기도로 인정하시고 그 기도를 응답하신다. 성령이 오신 신약시대의 교회는 이것이 재빨리 움직인다.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밤에 찬미하고 기도할 때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어지며 옥터가 움직이는 것을 경험했다. 하나님의 임재의 표현이다. 죄수들은 도망가지 못한 것은.그의 임재가 지배하였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경우, 교회가 다음날 처형하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간절히 빌었다. 성전을 향한 기도를 드린 것이다. 하나님은 응답하셨다. 저절로 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려졌고 천사의 인도를 받아 파숫군의 눈을 피하여 나갈 수 있었다. 성전을 향한 기도를 들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