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세속적 여권신장을 배격하지만 성경적 여권신장을 추구한다. 하나님이 이것을 아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그 본보기가 민36:1-13에 나온 슬로보핫의 다섯 딸에게서 보여진다. 딸들은 기업을 받을 수 없는 규정을 알았으나 기업을 갈망하여 적극적인 요청(민27:1-11)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심으로 새 법이 제정되었다. 아들이 없으면 딸에게, 딸이 없으면 형제에게, 형제가 없으면 아비의 형제에게, 그리고 그것도 없으면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돌리게 했다. 이 용기있는 여인들의 강청으로 만들어진 규례는 훗날, 모압 여인, 룻에게 영향을 미쳐 그리스도의 구속을 이루는 한 통로로 쓰임 받게 했다.
이 돌연변이 같은 사건은 신약시대에 더 활발하게 나타났다. 숨은 여자들의 역할은 대단했다. 요안나, 수산나, 막달라 마리아, 마리아, 루디아, 뵈뵈 등. 이들은 주님과 교회를 위하여 쓰임받은 경건한 여인들이다. 슬로보핫 딸들의 믿음의 노선을 따른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나타났나?
첫째, 운명의 장벽을 뛰어넘어 자기 기업을 구했다. 여자라하여 진출에 한계성을 느껴 주저앉지 않고 믿음으로 극복했다. 아들 역할을 하려고 기업을 요청했다. 운명이란 한계성을 뛰어 넘어 행하는 자가 예정주의자이다. 미리 정하셨다하여 운명론에 떨어지지 않는다. 주님이 은혜주시면 이 자리에서도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모압 여인, 룻도 절망적이었으나 나오미를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길을 선택하였다, 보아스를 만날 때도 저절로 기업을 얻을 수 없었다. 하나님이 도우셔서 기업을 무를 자가 포기하게 하심으로 그 순서가 보아스에게 돌아와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 한나 역시 그런 여인이었다. 현실의 난관을 믿음으로 뛰어 넘어 새 역사를 연 여인이다. 그리스도인의 기업인 그리스도와 구원과 성령의 은혜를 소유하기 위해 믿음으로 부르짖을 수 있다.
둘째, 그들은 기업 지키는 일에 헌신했다. 결혼으로 기업이 다른 지파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희년을 내다보고 자기들의 자유를 제약시켰다. 이것이 그들의 유쾌한 헌신이다. 가정보다 교회, 개인보다 교회, 개인의 유익보다 교회의 유익을 구할 때 주님은 복을 주셨다. 누구든지 복음을 위해 헌신하면 금세에 100배 내세에 영생을 넉넉히 얻는다. 슬로보핫의 딸들(므낫세 지파)은 희년을 내다보고 기업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를 희생했다. 달란트 받은 종처럼 자기 기업에 충성했다. 복음 안에서의 자유를 남용하지 아니하고 그 안에서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하는 그들의 태도가 복음을 아는 자가 가야할 길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씀으로 일하게 하는 마음이다. 거기에 적극성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게 하는 창조성이 생긴다. 말씀으로 일하시도록 자기를 허용하는 신자는 인간적 한계를 뛰어 넘는다. 백부장, 가나안 여인 그리고 실로암 소경의 믿음이 그런 부류에 속한다. 이 시대는 이런 믿음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교회인 총회에서 동성연애 목사안수의 시비를 가리는 것 자체가 심각한 교회 타락을 보여주는 즈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따르는 교회는 재에 앉아 깊이 회개하며 소돔 고모라의 심판을 두려워해야한다. 교회의 성결을 달라고 구해야한다. 거기에 우리는 성경적 여권신장을 찾아 그 풍성한 진리의 영역을 보아야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여권의 역할을 겸손히 수행함이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한 방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