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지망생

20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 선교는 매우 힘들었다. 선교 헌금을 모아 놓고도 전달할 길을 모색하려고 힘든 때가 있었다. 지금은 선교 한국이라고 할 정도로 너도 나도 선교라는 명칭을 붙여 선교에 집중한다, 선교사를 파송하고, 단기 선교사로 가기도 하고, 의료 선교사로 한 주간 두 주간 일을 하고 돌아온다. 어떤 단체는 자기 비지네스로 가서 선교 임무에 뛰어든다. 또 대학교수, 직장 직원으로 가 선교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말 고무적이며 선호할만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 평가 이면에 한편으로는 선교사라는 직분에 대한 경시풍조가 생긴 것 또한 사실이다. 정말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선교적 사명을 뛴 사람들이지만 선교사란 특별한 부름을 받은 직분임을 이해해야 한다. 전도하고 싶다 해서 다 선교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소정의 교육과 훈련 과정 없이 여행 삼아 가서 전도지 나눠주고 의약품을 전해 준 사람을 선교사라고 말하기에는 성경의 빛 아래서 볼 때 석연치 않은 점이 없지 않다. 일전에 본인도 두 번이나 중공에 다녀오면서 선교라는 것을 쉽게 생각한 일이 있었다. “교회에서 필요하면 나아가 선교하면 되는 것이다.” “미국 상황에서 얼마든지 외지에 나가 복음만 전하면 선교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쉽게 했다. 그러나 선교는 그 이상의 것임을 늦게서야 깨닫게 되었다.

“선교사는 목사 중 목사이다”는 말이 있다. 선교사는 외지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우는 목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소명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이 친히 세우시는 은사 중 하나이기 때문이 다. 바울처럼 선교사는 주께서 교회에 주신 선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가 되는 것은 인간적 기분이나 단체의 임명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야만 한다. 하나님의 소명이 있는가가 관건이란 말이다. 소명 의식 없으면서도 목사나 선교사가 되려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하는 일이다. 그는 자기 탑을 세우는 것이다. 교회 내의 바벨탑 세우는 일이며 선교라는 거룩한 이름을 빙자하여 자기 육적 만족을 채우기 위해 그 타이틀을 이용하겠다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이 오늘날 서구 선교기관이 범한 잘못이다. 선교를 빙자로 하여 경제식민 정책을 펴 나간 것은 이미 드러난 사실이다.

정말 선교하다가 죽을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도 결코 후회함이 없는가? 정말 자녀가 죽고, 아내가 병들고, 심지어 생존의 위험을 받을 수도 있다. 굶을 수도 있고 옥에 갇힐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복음 위해 남아 있을 수 있는가? 상급이나 보상이 없을 수도 있다 그래도 후회하지 않겠는가? 정말 복음만으로 만족하는가? 여기에 아멘한 자만이 선교사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참 선교사 모습을 가진 몇 사람을 알고 있다. 그들은 한결 같이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면서도 복음으로 인해 기뻐하는 의욕이 꽉 찬 사람들이 다. 선교 붐을 일으키고 자원을 찾아 권고하는 일은 중요하다. 이럴 때일수록 바른 소명이 확인된 선교사가 되어야한다. 주님은 자기 사람들을 통해서만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