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를 선교의 역사로 보아도 틀린 말이 아니다. 교회가 선교에 무관심하다면 안에서 밖으로 나타나는 복음의 능력을 거역하기 때문에 어두운 가운데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긴급성을 가진다. 누가복음 9:23-27에 나온 주님 가르침에는 세 가지 긴급성이 나타난다.
첫째, 생활의 안정보다 더 시급한 것이 선교이다.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다. 이 말은 생활의 안식처인 가정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생활의 안정보다 우선권이 선교라는 것이다. 배고픈 시대를 지나 가난의 괴로움과 답답함을 겪은 한국교회에 구원의 복을 물질의 번성과 동일시하는 기복주의가 왜 만연되었겠는가? 배고플 때 양식은 구원과 맞먹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가난의 때가 하나님을 더 깊이 가까이 하는 기회였고 진리를 발견하는 기회가 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부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제를 멀리하고 게을리 하여 유다말기의 혼합주의 신앙으로 떨어진 것 같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안정된 생활보다 선교와 전도가 더 급한 것을 알고 헌신하는 일이 될 것이다.
둘째, 장례보다 더 시급한 것이 선교이다. 장례식에 가야할 사람에게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는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 말은 윤리와 도덕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다. 주님은 아무리 주께 바친바 된 고르반이라 할지라도 부모에 대한 효도를 등한히 여기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도리어 둘 다 행하라고 말씀하셨다. 부친의 장례는 매우 시급한 일인데 그 보다 앞선 것이 복음전파라는 것이다. 때로는 윤리적 결례라고 지탄 받을지라도 선교와 전도는 먼저 해야 될 최우선순위이다. 이 긴급성을 아는 선배들이 오늘의 한국교회를 만들었다. 일사각오의 신앙을 가진 주기철 손양원목사님 같은 분들이 한국 교회의 산 신앙의 흐름을 만들었다고 보아야한다.
셋째, 송별보다 더 시급한 것이 선교이다. 앞서 말한 안정된 생활, 장례식도 시간을 다투고 가치를 다투지만 헌신된 자가 서원한 소명을 붙들고 마지막 떠나면서 부모에게 작별하는 일을 거절하신 것은 몰인정하고 파렴치한 일처럼 보인다. 잠깐이면 인사하고 자기 길을 가는 그 수고보다 더 시급한 일이 복음 전하는 일임을 가르침이다. 쟁기를 든 자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에 목적을 버리거나 변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작은 일이나 작은 한 순간을 무시한 자는 본래 받은 복음 전하는 일의 순수성을 더럽힐 수 있다. 비울은 선교의 긴급성을 알았기에 시간과 윤리와 생활의 기본을 뛰어 넘어 그 부름에 충성했다. 그에게 무수한 고생이 따랐으나 복음전파를 마치기 위하여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런 생명내댄 순교적 결단과 순종 위에서만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고 진행되고 완성된다.
캄보디아의 교육선교 역시 이런 순교적 생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것을 위하여 우리에게 먼저 할 것에 응답하라고 도전하신다. 물속에 빠져가고 불 속에 기절한 것 같은 1400만의 영혼들이 우리를 향하여 건너와서 도와달라고 손짓한다. 이 긴급성을 보는 눈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