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의 긴급성(1)

신약에 나타난 선교의 긴박성은 구약에도 나타난다. 그 중 하나가 엘리사 시대의 문둥이의 고백을 통해 보여진다. 열왕기하 7:9의 몇 낱말이 그 긴급성을 증거한다.

첫째증거. “오늘 들은 아름다운 소식” 문둥이들이 들은 메시지는 아람 진영에 아람 군대가 모두 도망가고 남겨둔 군량미가 풍성히 쌓여있다는 소식이다. 그 풍성한 양식을 얻기 위하여 거기로 오라는 뉴스이다. 당나귀 머리나 비둘기 똥을 먹으며 심지어 인육까지 먹는 처참한 지경의 사마리아 성내의 사람들에게 이것만큼 빅 뉴스는 없었을 것이다. 네 문둥이는 이 소식의 가치를 알았다. 복음은 이보다 더 가치있는 소식이다. 육신 문제의 해결 뿐 아니라 영혼의 죄가 처리되고 영생을 소유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온 세상에 전할 최대의 아름다운 소식을 알고있다. 언제 어디서나 이 소식을 듣고 믿기만 하면 거저 받아 누리는 은혜를 아는 자는 그 가치 때문에 돼지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거나 그것마저 얻지 못하여 아사직전에 있는 시대를 바라볼 때 긴박성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둘째 증거. 그들은 침묵의 위험성을 느껴 그 소식을 화급히 전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화가 임하는 의식을 가졌다. 이것은 자기에게 들려오는 선한 양심의 소리였다. 복을 아는 자는 이내가 듣고 이웃에게 빨리 알리지 않고 머뭇거려 그들이 지옥에 떨어진다면 벌을 받을 것 같은 성령의 감동을 느끼도록 되어있다. 그래서 바울은 온갖 고생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억지로 하지 아니하고 전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심판 의식으로 충만하여졌다.

셋째증거. 그들이 경험한 일은 거드름 피우고 늑장부리며 한시라도 지체할 수 없는 소식이었다. 이 소식을 전하려 가는 사이에 굶어 죽는 사람이 일어날 수 있는 최대의 긴박한 메시지를 가진 사실을 알고 그 날 밤을 넘기지 않고 담대히 나가 전해 극적으로 그 성 사람들을 살렸다. 누구나 그 소식을 알고 성문을 지나 그곳으로 나오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한 군대장관은 불신앙으로 발에 밟혀 죽었다. 불신앙은 보기는 하나 먹지 못하고 죽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 복음은 언제나 전하는 자나 받는 자에게 믿음을 필요로 한다.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기만하면 그 복된 자리로 나간다. 믿으면 영생이고 믿지 않으면 죽음이다.

1400만의 동남 아시아의 캄보디아 백성에게 교육선교를 하게 된 동기도 이런 긴박성에서 시작되었다. 6년전 프놈펜에 가서 현지 교역자들 150명 앞에서 디모데 전서를 강의한 일로 시작했다. 중풍의 후유증을 안고 있던 필자가 선배들의 권유로 직접 가 만나 본 그 곳은 정말 복음의 황금어장이었다. 폴퐅 정권으로 크리스챤과 지식인을 중심하여 200만 이상이 비참하게 죽은 현장을 보여주는 박물관은 지금도 불에 타는 송장 냄새가 하늘을 진동하는 것처럼 구역질이 솟아날 정도였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의 잔인함과 복음을 아는 사람들의 비참한 박해를 볼 때 복음전파의 긴박성을 느낀다. 더욱이 99%가 불교이고 문맹이 많고 매우 가난한 나라인 캄보디아, 더욱이 복음의 소식을 몰라 수 천년간 악령이 지배하여 천하 보다 귀한 영혼을 지옥 떨어지게 하는 상황은 복음의 일꾼인 우리를 부른다. 만일 우리가 이 복음을 외면한다면 우리의 복이 저주로 바꾸어질 것이다. 영적 긴박감을 가진 자가 살아있는 신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