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 중앙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는 상징주의(Symbolism)이다. 실체는 없이 그 의미만을 가르치기 위한 표현이 아니고, 실재하면서도 그것이 주는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에덴의 교제 장소에 있는 생명나무는 하나님이 생명이라는 원리를 보인 것이다. 영생은 하나님이심을 보인 것뿐이다.
이 생명 원리가 에덴 동산에 보인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는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만 살 수 있음을 보였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그들 존재의 근본이며 생명이며 원리이며 원천임을 보인 것이다. 그들 삶의 전 영역의 중심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목적과 방법이 하나님이심을 보인 셈이다. 이 하나님을 생명으로 삼음으로 그 만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그들의 길이며 하나님으로만 즐기는 삶이 행복이란 사실을 보여준다.
이 생명 원리는 구속 역사 속에서 뚜렷이 보여진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만이 생명이심을 분명히 보여주기에 시편 기자는 하나님만이 나의 방패요, 나의 요새요 나의 피난처시요, 환난 날에 나의 만날 큰 도움이라고 노래하였다. 아브라함의 복의 근원이 되는 사명은 먼저 하나님만이 복임을 알지 못할 때는 불가능함을 분명히 했다. 그러므로 “천하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아브라함적 복은 하나님만이 복의 근원이심을 제쳐두고 한 말이 아니다. 그를 제외한 행복은 저주요, 그를 제쳐 둔 안녕과 번성은 지옥 평안이고 극심한 심판을 자처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명기 복은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는 자에게”라는 조건 하에 주어진 것이다. 이는 하나님만이 생명이며 하나님만이 개인, 가정, 사회, 국가, 이 세상과 오는 세상 그리고 영원한 세상의 생명이심을 보이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이 생명의 열매를 잃어버렸다. 그 일로 그의 후손 위에 생명을 얻을 수 없는 죽음이 지배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 원리는 다시 살아난다. 오직 그리스도 자신이 이 생명나무의 실재로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생명이며 생명나무이시다. 이 사실은 요한복음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나타내신 소위, 자계시(self-disclosure revelation)에서 뚜렷이 보인다. 그가 참 포도나무요, 선한 목자요, 생명수요, 생명의 떡이라고 주장하심은 바로 생명 원리의 실체가 자신임을 주장함이다.
정말 그를 믿는 자는 아담이 먹지 못한 생명의 실체를 접하는 영광을 얻는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영생을 소유한 자로서의 신분 변화이다. 에덴에서의 생명나무의 실재를 체험한 자가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쟁이들은 이 생명의 맛을 알고 이 생명의 원리를 잘 아는 자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 생명의 원리는 장차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되는 세상에서도 너무나 뚜렷이 나타난다. 어린양 보좌 중심에서 만국에 흘러나는 생명강수는 바로 하나님만이 생명이심을 보이는 계시의 분명한 그림이다. 이 영생을 받은 신자들은 “하나님만이 생명이시다”는 원리를 중심한 삶을 감사하며 온 세상에 힘써 선포하는 증인의 삶을 즐거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