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의 선행위장술

현대 신자를 혼란케 하는 문제 중 하나가 윤리와 도덕 문제이다. 한 마디로 행함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신자가 세상 윤리보다 더 못할 때 욕을 먹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기에 행함에 신경을 쓰게 된다. 세상에서 교회가 제 사명을 못하다 보면 세상 사 람의 특이한 선행을 보고 혜성의 빛줄기를 보듯이 주관을 잃어 버리고 거기에 기울어 진다. 이것은 나쁜 것이라고 단정내리기가 어렵지만 자아 반성의 차원을 넘어 자포자기 내지, 믿음과 행함의 이원론적 모순에 빠지는 자리에 나갈 수 있다. 내 믿음은 정말 살아있는 것인가? 믿는 자의 행함이 세상 위인보다 못하지 않는가? 예수를 믿는 믿음 을 의심하기까지 한다. 이런 일들은 모두 행함과 믿음이 나무의 뿌리와 열매 관계임을 오해한데서 온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빛 아래서 이것을 정리해야만 한다.

첫째, 행함의 표준은 하나님 앞에 인정되는 선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영적 선이 라 한다. 아무리 사람의 평가가 훌륭하여 칭찬을 받아도 하나님의 표준에 모자라거나 넘어서는 모든 것은 그 자체가 무가치한 것이다. 이 말은 선을 가장한 죄란 뜻이다. 세상이 박수갈채를 보내어도 하나님이 아니라면 하나님 판단이 맞는 것이다. 신자는 하 나님 앞에서 모든 것이 점검되기를 바라고 그의 판단을 겸허히 받는 심령을 가졌기 때 문이다. (시139:1-24)

둘째, 행함은 믿음의 뿌리에서 나온 열매이어야 한다. 이 말은 행함과 믿음이 육체 와 영혼처럼 분리될 수 없는 하나란 것이다. 둘 사이에 틈(이원론)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마귀는 세상을 이원론적 윤리로 만들어버렸다. 이것은 역사적 심판의 요인이었던 가증스러운 죄악이다. 야고보가 행함 없는 믿음을 죽은 것으로 보는 것은 산 믿음에서 나온 열매로서의 행함을 강조한 것뿐이다.(약2:17) 바울의 “오직 믿음의 구원”을 반대 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믿은 마음 에서만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참된 행함이 나온다는 것이다. 행함의 문제는 믿음의 문 제이기 때문이다.

셋째, 선행으로 가장한 광명한 천사의 유혹에 현혹되지 말아야한다. 세상에서의 구제와 선행을 많이 행하려는 꿈과 열심은 거듭난 신자의 성향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선행이 하나님으로 시작하여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가기를 소원한다. 과부의 두렙 돈 헌금을 부자의 금돈 헌금보다 더 나은 것으로 평가한 주님의 기준은 영적 선의 가치를 따랐기 때문이다. (눅21:1-4) 모든 선행이 하나님으로 시작되고 하나님의 방법 으로 이루어 하나님에게만 영광이 돌아가게 하는 가르침을 따라야한다. 그러지 못한 선행은 자기 일을 한 것이고 사탄이 사용하는 악의 도구일 뿐이다.

사탄의 현대 위장술은 때로 위협, 고난, 환난으로 찾아오지만 때로는 선행이란 아름다운 가면을 쓰고 우리의 믿음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놓으려 한다. 신자의 생명샘인 성경에서 나온 사실을 희석시켜 그리스도의 풍성한 사랑과 진리에서 멀어지게 한다. 교묘한 사탄의 위장술에 넘어가지 말고 잘 분별하여 영적 선행의 열매를 많이 맺는 성령의 봄을 맞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