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당함의 고난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한갓 고행주의로 적용함과 달리, 그 누구도 보태거나 대신할 수 없는 독일무이한 사건으로 이해할 때 우리에게 진정한 감사가 나오며 참된 헌신을 하게 된다. 마26:72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한 베드로의 부인은 주님에게 깊은 고통을 안겨 준 매우 섭섭한 일이었다. 이것이 십자가 고난의 일부분이었다. 왜 그를 부인함이 십자가의 고난이었을까?

첫째.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관계는 연합이고 구원의 본질이다. 그래서 관계를 부인함은 구원을 부정하는 셈이다. “예수와 함께 있었다.”,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 “진실로 그 도당이다”는 말을 들을 때 베드로는 강하게 부인하며 저주까지 하였다. 이는 순간적이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스스로 끊는 행위이다. 부인하는 정도가 발전적이다.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노라”,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저주하고 맹세하여”라는 응답은 모두 주님과의 관계를 무참히 끊어버리는 발언이었다. 이것이 주님을 괴롭혔다. 이 죄는 사람들 앞에서 인자를 부인하면 인자도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너를 부인하겠다고 하실 정도로 치명적이다. 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고백은 이렇게 중요하다. 고백의 말에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와 삶의 영원이 결정되기 때문이다.(롬10:9-10)

둘째, 예수의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인간 예수로만 생각하는 그들의 전제 앞에 압도되고 말았다. 하나님으로의 자기주장을 인정치 않은 것이다. 일찍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던 고백을 번복한 것은 불신앙의 쓴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인본주의에서 나온 자유주의 신앙이 주님의 마음을 찌르고 말았다. 예수님을 하나님 대접하지 않는 것이며 물질과 쾌락을 하나님 대용으로 바꾼 것이다. 바알을 하나님이라 하는 고대 사람들처럼 예수를 하나님으로 받지 않는 말과 태도와 행동은 모두 십자가의 고통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성경에서 확인하고 분명히 응답해야 한다.

셋째, 예수의 인격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인간됨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인격을 경멸하였다. 인격을 무시하는 것은 그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여 벌레나 짐승처럼 생각하는 태도이다. 참 사람으로 가장 착하게 오신 그를 인정하지 않음이 십자가의 고통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그의 인격을 존중하고 그가 계심을 믿어야한다.(히11:6)

고난주간 우리는 부인함으로 고통을 받으신 주님을 생각하고 회개하고 그의 참 하나님 참 사람 되심을 인정하자. 그리고 그 분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연합 관계를 인정하고 자랑하고 주장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