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즐거움

복음은 그 자체가 기쁨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은 자 속에 기쁨이 솟아나게 되어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일하는 복음인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은 이 기쁨을 안겨준다. 이것이 성경에 나온 아브라함과 다윗과 그리고 베드로와 바울의 기쁨이었다.

첫째, 아브라함은 주전2200년 사람인데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생각하고 기뻐하였다.(요8:56) 그는 이스라엘의 작은 땅에서 먼 후날의 그리스도의 구원을 알고 즐거워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는 복음의 기쁨이 그에게 임한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일하심 때문 이다. 유대인들의 아브라함 자손이란 주장은 내용 없는 껍데기에 불과한 까닭은 그들 속에 성령의 역사가 없었기 때문에 가장 가까이 와 있는 복음의 실체를 대적할 뿐 아니라 그 복음의 기쁨을 맛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아브라함 의 자손이 아니고 마귀의 자손이었음이 드러났다. 도리어 천대 받은 사람들 곧, 심령이 가난함을 가진 실로암 소경이나 삭개오 그리고 수가성 여인같은 사람들이 경험한 은혜가 되었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나 오신 후에나 언제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이 놀라운 기쁨은 임하게 되어있다.

둘째, 다윗 역시, 주전1200년전 사람인 데도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기뻐하였다. 그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대속의 의미를 잘 알고 자신에게 바로 적용할 때 그 죄 사함을 알고 기뻐하였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성령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시편 64편에서 다윗은 압살롬의 교묘한 위험을 당하는 중에서도 의인은 여호와로 즐거워하는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이 성령의 역사로 된 열매이 다.(10)

셋째, 바울과 베드로 역시 이 기쁨이 있었다. 그들의 활동을 할 때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였다. 바울은 다메섹 회심 이후 그 복음의 기쁨을 알고 빌립보 감옥에서도 찬미할 수 있었고 로마의 감옥에서도 자기를 대적하든 안하든지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증거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즐거워했으며 환난 중에 있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권할 수 있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또 베드로는 수많는 넘어짐을 당하였지만 마침내 복음에 사로잡혀 성령의 은혜로 이 유쾌한 소식을 전하였다. 그는 성령을 선물로 혹은 유쾌하게 되는 것으로 표현했다. 나아가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전하기를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나 그들 속에 자리잡은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보고 기뻐하였다.(벧전1: 8) 아브라함과 다윗은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내다보고 즐거워했으나 그들은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즐거워했다. 언제나 성령의 역사로 알려 지고 맛보아지는 기쁨이란 점이 동질이다. 이 기쁨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약속된 것이다.

말로 다할 수 없 는 이 즐거움을 누리는 자로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