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이 우리 마음을 슬프게 하는 까닭은 가룟 유다의 전철을 따랐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7:5절에 유다가 목매 자살하는 사건을 통해 교훈을 얻는다. 그의 마음이 자살로 치 닿은 것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 펼쳐지는 구원의 세계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속을 맛 본 자는 구원의 생명과 능력의 매력에 이끌려 내 것으로 소유하려는 갈망 때문에 공허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배신의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7:1-10은 그 배신을 이렇게 보여준다.
첫째, 동족의 배신(1)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죽이려 했다. 자기 동족을 사랑하여 그들의 땅에 왔는데도 그를 영접치 않았다.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배은망덕한 것이다. 어떤 임금이 포도원을 농부에게 맡기고 먼 타국에 가, 추수 때 종들을 보내 세를 받으려 하자, 종들을 때리고 더러는 죽였다고 주님이 비유로 하신 말씀처럼 그리스도는 자기 동족에게 배신을 당하셨다.
둘째, 제자들의 배신. 잡히시던 날 제자들은 그 자리에 하나도 없었다.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베드로까지 제자들 모두가 주님을 홀로 두고 도망쳤던 배반은 주님을 고독하게 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는 예언대로 그 누구도 동정할 수 없는 철저한 고독의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주님이 지셔야만 자기 백성의 근본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3년간 동고동락하던 제자들이 모두 떠난 광야에서 주님은 그들을 위하여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하셨을 것이다. 600년 전 유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감옥에 떨어진 심각한 고독의 자리에서 기도함으로 기이한 일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고독의 십자가를 지신 주의 공로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고독, 우울증, 히스테리 같은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배신당하신 주님을 주목하고 그 분께 부르짖는데 있다.
셋째, 가장 가까이 있는 자의 반역. 유다는 주님이 끝까지 사랑한 제자 중 하나였다.(요13:1-1-2) 최대의 사랑을 받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되었나?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중 하나이다. 분명한 것은 주님이 끝까지 그를 사랑한 것이 사실이었고 유다가 그 사랑의 대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그 사랑마저 거절하였을 때 버림받은 자가 된 것 역시 분명한 진리이다. 우리는 그가 스스로 목매 죽는 결과를 보고서 그는 택함 받은 자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뿐이다. 무엇보다 우리 관심은 가장 가까이 있는 자의 반역이 얼마나 주님을 고통스럽게 했을 것인가라는 점이다. 그는 반역하여 버림을 받았으나 주님은 그의 배반을 이용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기이한 역사를 가져왔다. 가룟 유다는 구속을 이루는 일시적인 도구였을 뿐이다. 천국 문에 키스하고 지옥에 간 사람이다.(마26:9) 마태는 은 30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 나그네의 묘지로 삼은 일이 예레미야와 스가랴의 예언의 성취라고 해석했다.(렘19:1-13, 32:6-9, 슥11:12-13) 아무리 치명적인 배신일지라도 하나님의 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신실이 사라져가는 배신 많은 세상에서 주님을 가까이 섬겨 신실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