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Paul AD 69)

다른 사도와는 달리 바울의 순교 장소에 약간의 혼란이 있다. 그는 항상 로마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열심을 가졌고 거기서 순교했다. 바울은 두 번씩이나 비용 때문에 로마에서 지냈다. 바울의 여행 계획과 편의도 일급이었으나 사도는 이 두 가지에 모두 적응했다. 사도행전과 그의 서신을 통해 보면 바울은 자신의 때가 단축되었기에 그가 받은 모든 시간들을 감사했다. 바울은 큰 신학적 원리뿐만 아니라 자기 삶의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다. 그는 많은 은혜의 필요를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했다.

그의 마지막 생각에는 후회함이 없고 은혜에 흠뻑 젖은 생활에서 흐르는 만족으로 충만했다. 그는 디모데에게 편지하기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6-8)”라고 했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 폭 넓게 여행하며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했다. 골로새교인에게 보낸 그의 말에 잘 요약되어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혹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권하고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1:28-29)

바울 생애에 가장 큰 아이러니 중 하나는 그가 교회를 핍박하는 동안 복음은 널리 퍼져 많은 것을 성취시켰다는 것이다. 예루살렘과 주변에 흩어진 신자들을 잡으려는 바울의 수고가 도리어 그들로 가는 곳마다 복음의 씨앗을 심게 했다. 참되신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성취하려고 악인의 계획과 수고를 이용하셨다. 그러던 바울이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후 돌이켰고 그의 이전 생활의 불같은 성격이 그리스도를 위한 희생으로 나타났다. 교회에 보내진 그의 편지 곧, 신약 절반 이상이 그의 기록이다. 그는 선교의 삶에 표준이 되었다. 그는 복음전도자의 실천의 본을 보였다. 그는 많은 교회를 개척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비유대인에게 담대히 적용했고 그를 받아드리는 사람에게 자신의 신실함을 보여주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그 사람이 남은 생에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고대 세계의 복음전도자인 그가 자기 사역을 부분과 전체로 보는 개념을 우리에게 제시했다. 아래 구절이 하나님의 종의 희생이 우리를 두렵게 하지만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당할 공통된 경험의 한 선구자로 보여진다. 그들은 복음을 위해 모든 위험을 당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 이루신 우리의 구원은 측량할 수 없이 값진 것이다. 우리가 주장하는 믿음은 신실한 값을 드린 수많은 손길에 의해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11:24-28)

만일 우리가 고난을 우리 목표로 삼는다면 바울 생애로부터 오는 중요한 교훈을 놓친 것이다. 고난은 복종과 신실함의 정확한 척도가 아니다. 불순종 불신실함이 고난을 가져올 수 있다. 고난이 목표일 때 교만은 숨은 동기가 될 수 있다.

고난은 복종과 신실함의 열매에 의해 예측할 수가 없다. 그러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 중 예측할 수 없는 큰 일 곧, 기쁨이 생긴다. 위대한 믿음의 순교자의 본은 기쁨 으로 충만하며 조심하는 삶이었다. 그들은 고난을 구하지 않았으나 거기서 도망가지도 않았다. 그들은 바울이 한 것처럼 긍정적 자족의 원리를 배웠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4:11-13)

바울은 땅 끝까지 가지 못하게 막으시는 성령의 뜻을 따랐다. 전통에 의해 그의 마지막 이야기와 스페인까지 가서 사역하려는 그의 소원을 나타내는 성경의 언급(롬15:23-24)은 자기 여행 범위를 아라비아에서부터 영국 섬까지 생각한 것처럼 보인다. 로마 감옥에 두 번 갇히는 침묵의 6년간 그는 광범위한 여행을 한 것 같다.

사도의 마지막 죽음은 로마 성벽 밖, 오스틴 길의 어떤 지점이다. 전통에 의하며 바울과 베드로가 같은 날 순교당했다고 말한다. 어부, 베드로는 거꾸러 십자가에 죽었고, 바리새인, 바울은 성 밖에서 목 베임을 당했다고 전한다. 그 두 사람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경주를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똑같이 따라야 할 중요한 두 가지 이유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