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징조를 자상하게 가르치신 주님은 그 때를 준비하는 지혜 두 가지를 반복 적으로 가르치셨다. 하나는 경성이고 다른 하나는 충성이다. 이것을 가질 수 있는 마음이 바로 겸손한 심령 곧, 푸토코스의 마음(마5:3)이다. 그 마음이 우리로 정신 차리게 하고 현실을 진지하게 임하게 한다. 꿈을 가지나 욕심에 치우치지 않고 현 실에 성실하게 하고, 그 나라의 은혜를 사모하나 현실의 충성에 참여한다. 퓨리탄 이 후천년설의 이상을 따른 이유가 이런 균형문제 때문이다. 사실상 후천년설이나 역사적 전천년설이나 무천년설은 모두 현실의 삶에 경성과 충성을 갖게 한다. 그러 나 그릇된 종말론은 생활을 치우치게 한다. 시한부 종말론은 현실을 무시하고 미 래에 치우치게 한다. 마24:29-51에 나타난 주님의 결론은 백성의 관심이 날에 있지 않음을 가리키고 그 날과 그 시를 모르기 때문에 현재에 주의해야 한다고 하셨다.
첫째, 모르는 것이 왜 유익한가? 영적 긴장을 유지하게 하기 때문이다. 긴장은 주권이 인정될 때 생긴다. 이 긴장이 위기를 잘 견디게 한다. 겸손하게 만들기 때 문이다. 겸손한 마음이 기독교의 첫째 덕만이 아니라 종말을 장식할 때 가져야 할 은혜의 그릇이다. 어떤 일에 겸손을 배운다면 이것은 노다지를 건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자기 질병이 기도의 기적으로 나았거나 자연 치료로 나았거나 둘 다 하 나님이 하신 일이다. 고로 겸손이 목표이다. 일반은총을 사용해도 거기에 겸손이 있으면 되나 기적으로 치유되었다 하여 히스기야처럼 교만하면 망한다. 그래서 모든 영적 체험의 알파와 오메가가 바로 겸손이다. 겸손해야 하나님이 끝까지 쓰며 수시로 은혜를 받게 된다. 겸손한 생각 겸손한 말, 겸손한 행동, 그리고 겸손한 자세는 말씀에 착념하여 성령이 역사할 때 생긴다.
둘째, 경성해야한다. 42절에 그러므로 깨어있으라고 했다. 주인을 기다리는 사 모의 마음, 앙망의 마음을 잃는다면 큰 문제이다. 그래서 전도자는 말하기를 형통 과 곤고한 날을 병행하여 주시는 이유가 장래 일을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려함 이라고 했다. 몰라야만 긴장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모하고 그 대답을 찾으려고 구한다. 이것이 살아있는 증거이다. 반대로 다 이루었다고 하면 곧 넘어진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어디에 이르렀다고 안주하지 말고 달려가고 좇아가는 자세로 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신자는 일보다 주인을 더 좋아해야한다. 경성을 싫어하는 시대는 주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를 의지하는 자율주의자가 된다.
셋째, 충성해야한다. 무엇보다 현실은 기회이다. 죽은 사자보다 산 개가 더 낫다. 지금 살아서 무엇을 하는 것이 최선의 기회이다. 나 한 사람이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 하나가 천을 이루고 가장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룬다. 그리고 현실의 신실이란 지혜로 행하는 것이다. 지혜란 딱 맞는 방법이고 처음과 결과까지 가는 것이다. 주인이 더디오리라 하여 술 친구를 두고 방탕하는 자는 지혜가 없는 자이 다. 성령받은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경성과 충성을 힘쓰게 된다. 무엇보다 마음의 가난이 귀하다. 복의 핵심인 그 마음을 잃지 말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