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의 종말론-열 처녀 비유

열 처녀 비유만으로 4년을 설교한 토마스 세퍼드라는 유명한 청교도 설교자는 그리스도인의 사랑 때문에 깨어있는 생활의 소중성을 깊이 깨달았다. 열 처녀 비유(마25:1-13)는 경성을 강조한다. 앙망하며 깨어있는 생활, 사모하는 생활 그리고 기다리는 생활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마5:7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라고 증거 한다. 어떻게 경성할까? 본 비유는 두 가지를 말한다.

첫째, 기름을 준비해야 한다. 기름은 성령을 가리킨다.(시23:6) 예수님도 구원받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신다 했고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며 성령의 능력을 받기까지는 일하지 말라고 했다. 바울도 구원의 도리를 다 설명한 후, 영과 육의 싸움을 말하면서 마침내 성령을 좇는 것이 우리 할 일로 요약하고 있다.(갈5:) 요 한은 신자 안에 거하신 기름 부으심을 따르라 했고 야고보는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사모 하신다고 했다. 우리가 두 그룹을 서로 비교할 때 그들은 모두 등을 소유했고 다 졸았고 같이 신랑을 기다렸고 신랑이란 소리를 들었다. 외식주의자나 진실주의자는 겉으로 보아서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기름이었다. 그들은 준비된 기름이 없는 것이다. 즉 계속적인 성령의 은혜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 이다. 가룟 유다와 다른 제자의 차이는 바로 이 점이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계속적인 관계에 신경을 쓰는 것이 생명이 있는 증거 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능력 세례를 사모하고 받아야한다. 성령의 세례 성령 충만, 성령의 능력의 세례가 그리스도인에게는 사모되어야 한다. 이것이 있을 때 능력의 삶이 가능하다.(벧전1:8) 엘리사의 사모심이 성령의 권능을 받게 했다. 그는 언제 받았나? 사모하는 그 때 이미 주님은 일하시고 계신 것이다. 갑절의 영감은 사모의 그릇 위에 이미 임한다.

둘째, 주를 아는 일에 힘써야한다. 2절에 나온 일이 마태 7장의 것과 같다. 그 때 불법을 행한 자라고 했다. 일보다 주님을 몰랐기 때문이다. 봉사냐? 주님이냐? 주님이냐 구제냐? 주님을 바로 모르면 주님을 떠나게 된다. 그들의 실책은 하나님 을 아는 것을 소홀히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을 알기위해 살아야 한다. 그의 사랑과 진실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성령으로 알려지는 것이다. 그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요17:3) 아는 것은 마음의 일이다. 지식을 뛰어 넘는 교감 있는 교제 상태를 가리킨다. 성경을 먼저 알아야 하고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고, 기도함으로 교제를 힘써야 하고,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의 일을 배워야 하고, 문제를 통하여 하나님이 숨겨놓으신 은혜를 구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기름을 가진 지혜로운 자에게 속한다. 부족하여도 이제 우리는 시작할 수 있다. 지혜자의 삶을 그대로 지키려고 힘써야 한다. 그것은 성령의 은혜를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것이고 주를 개인적으로 깊이 알려는 진지함을 갖는 것이다. 주님 오실 날이 다가 온 때에 우리는 겸손하게 기름을 늘 준비하고 주님과 교제하다가 신랑이 오실 때, 즉시 그 세계에 들어가는 사람으로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