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처럼 우리 입에 오르내리는 말도 없을 것이다. 믿음이란 막연한 기대를 가리키는 세상적 신념이 아니고 오직 성령받은 신자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기능이기 때문이다. 믿음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이기에 일상의 호흡이나 음식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물 떠난 물고기나 공기 떠난 새를 생각할 수 없듯이 신자란 최소한 믿음,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진실로 신뢰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자기 의사에 앞서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더욱이 믿음이란 생각이나 말로 무슨 일을 하든지 단골 메뉴처럼 필요한 수단으로 나타난다. 믿음 없이 되는 일이 하나도 없지만 믿음이 있으면 모든 일이 가능해 진다. 그래서 신자의 총 관심은 믿음 성장에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온 마르다의 신앙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관찰할 때 우리는 참 믿음을 배울 수 있다. 어떤 변화인가?
첫째 마르다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주님으로 믿었다. 주께서 여기에 안 계셨기에 오라비가 죽었다(21)는 말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시는 주님으로 믿는 다는 뜻이다. 그녀는 신념 곧 이론적 신앙에 머물렀다.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면서도 실제는 믿지 않은 실천적 무실론자인 셈이다. 이것은 우리도 그럴 수 있기 때문에 극히 염려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백부장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 넘어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의 능력을 믿어 주님의 칭찬을 받았다.(눅7:1-10) 주님보다 현실이 더 커 보일 때 허울 좋은 메끼 칠한 신앙으로 전락하기 쉬워진다.
둘째 마르다는 현재의 주님으로 믿지 못했다. 단지 마지막 날에 살리는 주님임을 믿는 미래지향적이었다.(24) 나사로를 현재 살리는 분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은 그 믿음의 폭이 현실 문제를 다스리시는 현재의 주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과의 잠깐 대화로 그의 신앙은 변화를 일으켰다. 주님 자신이 부활이고 생명이라는 주장을 믿는다고 말했다.(25-27) 약한 믿음일지라도 주님과의 교제를 가질 때 의심의 구름이 사라진다. 그 교제로 그리스도의 실상이 알려지면 그 믿음은 체험적이 되어 버린다. 언제나 믿음 성장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비례한다.
셋째 그는 무덤 앞에서 또 다른 불신앙을 표현했다. 죽은지 나흘이 되어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39) 주님이 현재 할 수 없는 분으로 취급하며 도리어 주님의 명예 실추를 염려하는 불신앙이다. 이것 역시 현실의 죽음이란 사건이 주님보다 더 크게 보였기 때문이다. 현재의 생명이신 주님을 믿질 못한 것이다. 그만큼 신념의 노예가 되어있었다. 성경적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를 현재 아는 것만큼 자란다. 어느 사이에 마르다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자리로 나갔다.(27)
이렇게 보면 일찍이 말씀을 등한히 여긴 마르다의 불신앙적 관심을 경계하신 이유가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영적인 것 보다 육적인 것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그의 믿음이 변화되는 것을 원하신 것이다.
마르다 신앙의 변화 과정에서 우리는 정말 주님과 그 말씀을 현재 여기서 믿는 것이 우리의 목표임을 배운다. 그럴 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