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랜드 테일러(Rowland Taylor) (1510-1555)

교육을 받거나 설교하지 않았으나 애국주의자였던 로랜드 테일러는 그의 우수한 생활 때문에 잔혹하게 죽임을 당했고 그의 자녀들은 어버지 없는 아이들이 되었다. 정말 로랜드의 부친은 부유하진 않았으나 부와 관계가 있어 자손들이 번성할 수 있도록 할 최상의 사람으로 인정을 받아 특별한 영역의 사무관으로 일했다.

로랜드도 그랬다.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24세의 로랜드는 캠브릿지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설교로 영향을 미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시대가 가장 위험한 때에 로랜드에게 모든 것이걸려 있었다. 로랜드는 그의 교육과 궁정사무직을 통해 로랜드는 사제직의 무오성과 성찬의 포도주와 떡의 기적적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거절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실로 로랜드의 결혼조차도 그를 선구자로 돋보이게 했다 그의 사랑하는 마가렛이 1536년에 성경과 다른 개혁서적을 영어로 번역해서 화형을 당한 윌리엄 틴데일의 여동생이란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랜드는 성직자의 의무를 다했고 대주교 토마스 크래머의 집에서 목사로 섬기면서 그와 교제하고 있었다. 그는 슈포크시의 하들리히 교구를 맡아 그의 목회 사역에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때 모든 것이 바뀌었다. 친애하는 젊은 개혁의 왕, 에드워드 6세 (헨리8세의 계승자)가 죽고 로랜드의 지지자인 레이디 제인 그레이가 보좌에 올랐다가 단 9일 만에 에드워드의 이복누이인 메어리가 여왕이 되어 로마교로 복귀시키는 정책이 세워지고 실행되었다.

메어리 복귀 후 며칠 만에 하들리히에 있는 테일러 교구는 존 에벌스에 의해 공격을 당했다. 이웃의 강한 캐톨릭 신봉자며 사제인 그는 무장 경호원을 대동하여 미사를 집전하고 그를 견제하는 교회에서 테일러를 출교시키고 그 날 밤 죽음으로 내 몰았다.

에벌스의 협력자들이 메어리 여왕이 그녀의 교회개혁을 단행하는 직무를 부여한 영국 왕의 자문관인 스테판 가디너에게 진정서를 보냈다. 가디너의 대답은 죽이라는 것이었다. 그 대답이 하들리히에 도착하자 테일러의 많은 교인들이 간곡히 만류했다. 어떤 이들은 마태복음 10:23을 인용하면서 폭풍후가 지나간 후 훗날의 사역을 도모하기 위하여 목숨을 아끼도록 강권했다. 테일러는 대답하기를 “스스로 자유하라 너의 양심이 이끄는 대로 행하라. 나 자신을 위하여 분명히 감독에게 가기로 결정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를 대면하여 그가 내게 행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음을 말할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행한 것보다 더 부지런히 열매를 맺히도록 내 뒤에 교사들을 일으켜 가르치게 하실 것이다.”고 했다.

로랜드 테일러는 런던에 있는 자문관인 가드너가 심문할 때 담대했다. 그는 공동기도서에 나타난 최근의 내용을 보이면서 영국교회를 개혁하고 새롭게 하는 헨리와 메어리의 맹세를 기억하라고 그 감독에게 간청했다. 그러나 가드너는 이 맹세를 불법적이고 깨뜨리기에 합당한 맹세로 처리했다. 그리고 그는 테이블로 돌아와서 배반한 테일러를 책망하며 이교도라고 선언했다. (그가 하들리히 교구에서 미사 집전을 반대했기 때문에)

테일러는 대답하기를 “선생이여 나는 하들리히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와서 내게 맡긴 양들을 전염시키도록 놔두는 것은 바른 양심을 거스리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예정된 승리자에게 책임이 주어졌고 그 결과는 명백했다.

테일러는 1555년 1월 22일에 그의 공식적인 수감생활 2년을 마쳤다. 그 죄는 이교로서 이단이었고 교구 내에 이틀 먼저 부활된 이교도를 화형시키는 법을 적용했다. 그는 2월 9일에 하들리히의 알함 콤몬에서 경찰 손에 넘겨졌다. 거기서 그는 마가렛과 그의 자녀들과 마지막으로 만나도록 허용되었고 기둥에 묶였다. 그의 어린 아들 토마스에게 그는 죽음에 처한 아버지로서 마지막 축복기도를 했다.

“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아들에게 복을 주시고 성령을 부으셔서 그리스도의 참 종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끊임없이 그의 생애에 당신의 진리에 서도록 해 주소서. 그리고 나의 아들이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하게하소서 모든 죄와 악한 삶을 날려 보내게 하소서. 하나님을 매일 기도함으로 섬기고 그의 어머니께 복종하도록 은혜를 주소서. 그의 아버지인 제가 거룩한 결혼을 위하여 죽은 것을 기억하여 음탕한 세계에서 자유하게 하소서. 그가 훗날 하나님이 축복하실 때 가난한자를 돌보는 일에 풍성케 하소서. 그의 어머니가 나이가 많을 때 버리지 말고 힘을 다해 돌보게 하소서 이 때문에 하나님이 내가 기도한대로 나의 아들에게 복 주어 땅에서 장수하고 잘되게 하실 것입니다.”

테일러는 메어리 여왕의 짧은 통치기간에 화형당한 수 백명 가운데 3번째 순교자였다. 메어리의 네 번째 희생자인 죤 후퍼는 그 날 오후에 화형을 당했다. 아마 테일러의 화형이 아직 마쳐지지 않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꽃이 올라갈 때 집행관 중 한 사람이 테일러를 빨리 죽이기 위해 그의 머리를 막대기로 때렸다. 보잘 것 없는 그의 비석에는 “선을 방어하기 위해 테일러 박사는 여기서 그의 피를 뿌렸다”고 적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