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없는 섬김

보통 섬김하면 봉사의 동이어로 생각하나 성경에는 인간의 섬김보다 먼저 하나님이 섬김인 예배를 가리킨다. 그래서 영어로 service를 worship의 개념으로 생각한다.

사가랴가 은혜를 받은 후 깨달은 “두려움 없는 섬김”이란 교회가 주님을 영원히 섬기는 예배를 가리킨다. 하나님 앞에서의 섬김은 두려움이 있다. 스랍들이 예배할 때 6날개 중 4날개로 얼굴과 발을 가리고 2 날개로 날며 보좌에 계신 분을 창화한 것은 두려운 섬김의 한 샘플이다. 자기 부인에 무게를 두고 겸손히 섬기는 예배이기 때문이다.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 섬기는 것은 성경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삼손의 부모 마노아 부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혔었고 제자들이 풍랑 위를 걸어오신 주님을 맞이한 후 두려워했고 부활의 빈 무덤을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는 너무 두려워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하나님 섬김에 오는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그 두려움이 그리스도 안에서 담대함으로 바꾸어졌다. 이것이 두려움 없는 섬김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첫째, 그리스도 피의 효능 때문이다. 히브리서 9:14절에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고 반문할 정도로 구약의 제사제도보다 더 우수함을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의 담력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둘째, 성부의 완전한 평가 때문이다. 갈보리 언덕. 한 지점에, 한 때에 신음하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현장을 직접 본 자는 그리 많지 못했다. 보았다 해도 그것이 어떤 증거의 힘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도 다 도망친 것을 보면 그 현장을 재대로 볼 수도 없었다. 십자가에 매달릴 때 채찍에 몇 번 맞고, 몇 번 넘어진 것을 볼 수 없었다 할지라도 오직 성부가 그의 죽음을 보고 만족하신 것이다. 그 피를 보고 아스라엘의 집을 넘어가시는 하나님이시다. 오직 하나님 보시라고 흘린 피였다, 그 피를 보신 성부는 만족하셨고 성자도 성령도 만족하셨기에 자기 백성 모두가 담대할 수 있게 되었다. (사53:11-12)

(3) 성령의 완전한 충만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담력은 우리의 구원을 처음부터 마치시는 그 날까지 영원히 함께 하시는 성령의 역사 때문이다. 성령은 하나님 앞에서 섬기는 신자의 양심에 담력을 갖도록 항상 임하시고 통제하시고 간섭하심으로써 육체소욕의 어떤 유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모든 것으로 충만하시기에 우리로 두려움 없는 섬김에 서게 하신다.

이처럼 삼위 하나님의 충만으로 채워진 상태가 두려움 없는 섬김이다. 세상에 있는 동안 성도는 이런 섬김으로 살아가도록 하셨다. 가정에 평안이 있고 직장에 활기가 있고 어두운 사회에 빛을 비추며 살아간다. 세상 빛은 이 섬김의 등잔에서 나온 빛이다. 그래서 바울은 선한양심을 버리지 말라고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