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모든 문제는 그리스도의 구원에 나타난 영광을 봄으로 풀려진다. 바벨론의 포로귀환이나 출애굽 사건은 과거에 나타난 구속의 그림이다. 죄사함으로 시작되는 구원은 어떤 형태로 자라 풍성한 열매를 나타내는가? 과연 구원의 영광이란 어떤 것인가? 이것을 잘 보인 시편85:10-11은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고 말한다. 마치 처녀 총각이 서로 연애하는 장면을 생각케 하는 그림이다. 만나고 입맞추고 그리고 서로 사모함이 그러하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생명을 나누는 구원은 정적이거나 수동적이지만 않고 동적이며 능동적이다. 이것이 구원의 영광이 비추이는 현장이다. 거기에 나타난 구속의 은혜인 하나님과의 연합은 실제로 어떤 것인가?
첫째, 인애와 진리의 만남은 그 영광의 기초라 할 수 있다. 인애란 사랑이고 진리란 진실성을 가리킨다. 이 둘의 만남이 첫 연합이고 기본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신실의 만남으로 이루어졌기에 그 어떤 무엇이 끊을 수 없다.(롬8:39) 그러므로 진리 없는 사랑은 악하고 타락이며, 사랑없는 진리는 균형을 잃어 치우친다. 사랑과 신실만으로도 아름다고 능력있고 유익하지만 서로가 만나질 때 더 아름다워지고 강해진다. 그래서 이 둘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이 둘의 만남의 스파크는 불을 피우듯이 새로운 열매를 나타낸다.
둘째, 화평과 의의 입맞춤이 그 영광의 누림이다. 이 둘의 입맞춤은 아들에게 입맞추는 메시야의 시편을 생각하게 한다.(시2:) 구속의 영광을 누리는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질 때 생겨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우선 의를 소유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때 구원이 시작되고 하나님과의 화평이 성취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의는 이웃과의 화목의 근거가 되기에 바울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고 했고(롬12:17-19) 야고보는 화평을 심고 의의 열매를 거둔다고 말했다. (약3:18) 화평이 있느냐? 그 배경은 의가 있을 것이고 의가 있느냐 곧 화평이 다가올 것이다. 이 둘의 입맞춤은 구속받은 자가 항상 누리는 열매이다. 복음은 이것을 목표로 역사한다. 영생의 삶이 그리스도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라면 그 내용이 바로 그 입맞춤이다. 그것은 성령이 능력의 세례받음이라고 말하는 퓨리탄의 성령관과 통한다.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누리는 베드로의 경험이 바로 이것이다. (벧전1:8)
셋째, 진리와 의 간의 사모심이 그 영광의 광채이다. 구속의 은혜는 만남과 입맞춤만이 아니라 서로의 사모심의 열정으로 표현된다. 땅에서 솟아나는 진리를 내려다보고 응원을 보내고 만나고 싶어하는 인격적 교류를 항상 놓치지 않는 그리움이 있다. 스데반이 돌탕에 맞아 순교할 때 하늘 보좌에 계신 인자께서 서서 지켜 보셨듯이 의는 항상 말씀에 신실한 마음을 향해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준다. 때로는 치료의 광선으로, 때로는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붓는다. 성령안에서 그의 영광을 보는 자는 그의 형상으로 변하여 간다. 이 경외심이 점점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한다. 하나님의 성품인 의와 진리와 사랑은 이 연합을 통하여 더 선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선한양심이 파선되고 방황하는 우리 시대에 이 구속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 실재를 즐거워하는 삶만이 이 곤고의 터널을 잘 통과하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