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의 여명

“구원”, “속량”, “속죄” 등으로 묘사하는 구속의 골자는 한마디로 죄 사함이다. 바울은 구속이 죄 사함이고 죄 사함이 구속으로 생각했다.(엡1:7) 왜 신자는 구속을 깊이 이해해야 하는가?

첫째, 구속의 흐름이 역사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되 제한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은혜를 베푸셨다. 창세기 3:15절에 보여진 원시복음에 사탄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과 연합되는 구원을 하나님이 친히 여인의 후손의 죽음과 원수의 공격으로 오는 수많은 고난을 통해 이루시겠다는 것을 약속하셨다. 이것이 구속 계시의 씨앗이다. 역사의 오랜 시간은 이것을 둘러싸고 움직이는 사건들이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삶과 온 세상의 크고 작은 사건들은 모두 이 흐름의 분지들일 뿐이다. 그 지류를 따라가면 마침내 구속의 대양으로 나가게 되며 그리스도의 구속을 따라 가다 보면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기이한 흐름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의 일생 하나 하나의 사건은 모두 구속과 관련된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과의 연관성을 생각해야만 정답이 나온다. 구속의 지평과 나의 생애의 지평이 서로 융합 되는 곳에서 우리는 가장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함부로 목숨을 버리려는 사람들에게 이 지평의 융합을 보여주어야 한다.

둘째, 구속은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완성된다. 구속의 흐름은 창조와 섭리라는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 흘러간다. 창조하신 그 분은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다스리신다. 이것을 섭리 곧, 간섭하심이라고 말한다. 참새 두 마리의 거래까지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는 전능하신 손이며 신실하신 손이며 신비스러운 손길이다. 한 신자가 복음을 접할 때 거듭나고 영생가진 사람이 될 때 간섭하신 그 분은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기까지 여러 사람, 여러 사건을 통해 친히 일하신다. 때로는 우연이라 생각하는 일이나 때로는 내가 하는 것처럼 하는 것에 이미 주님은 그 속에서 일하셨고 내가 무관심하는 그 방면에 이미 주님은 그것을 붙들고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 고난이란 풍랑 속에서도 때로는 기적으로, 때로는 견디게 하심으로 자기 백성을 연단하여 구속을 완성하신다. 그 신실하신 손길을 의지하고 순종할 때 완성품이 되어 간다. 혼동된 세대일수록 신자의 눈은 이 흐름을 탈줄 알아야한다.

셋째, 구속은 영적 승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구속의 중심에는 죄 사함이란 샘물이 솟아난다. 생수의 강처럼 그칠 줄 모르는 샘물처럼 솟아나는 죄 사함은 실재 중 실재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신자의 승리를 외적인 부귀영화로 규정지을 수 없다. 오직 죄를 이겼느냐 않느냐로 평가될 뿐이다. 죄 사함의 은혜를 아는 자가 죄를 이길 수 있다. 우리의 예배, 헌신, 봉사 그리고 전도와 선교는 모두 죄와 싸우는 일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먹고 마시고, 가고 머물고, 배우고 가르치고 그리고 자립하게 하는 모든 것이 죄 짓지 않는 방법으로 해야 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로마서의 바울의 목표는 높게는 하나님의 형상회복에 이루는 것이지만 깊게는 개인의 마음에 죄와 싸워 이기는 자리에 서게 하는 것이다. 구속의 완성이 다가오는 이 때 구속을 깊이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