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시대의 순교 (1500-1600)

마틴 루터는 신학과 행위 사이에 생긴 모순을 증거하려 했다. 무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교회를 깊게 관찰했다. 그는 단지 정치와 관리 소홀로 인하여 굳어버린 교리를 토론하고 논쟁하려 했을 뿐이었다. 그는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1517년 10월 31일에 속죄부의 힘과 효과에 관한 반박문(95개 조항으로 알려진)을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붙여놓았다. 많은 사람이 그 과정에서 죽임을 당했다.

루터는 학자이며 행동가였다. 1520년 그는 공식적 문서를 불태웠다. 다음 해, 출교된 루터는 4월에 웜스 국회 앞에 나타났다. 거기서 “내가 여기 서 있다”는 유명한 변론을 했다. 그 결과 루터는 범법한 사람으로 간주되었고 그의 문서는 금지되었다. 루터는 자기 땅의 총독이며 견고한 지지자인 삭소니의 프레드릭 공의 보호 아래 살아날 수 있었다.

그 일은 한 독일 신부에 의해 착수된 다른 개혁 운동으로 번져갔다. 쭈리히 교구장인 울리취 쯔잉글리가 루터의 개혁을 지원하면서 성찬의 떡과 잔에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임재한다는 독특한 가르침을 제안했다. 1536년 제네바에서 프랑스 변호사인 존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출판하여 오늘날까지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를 최초의 조직신학으로 굳게 세웠다.

16세기에 재세례파와 메노나이트( 화란 사제인 메노 시몬에 의해 이끈)는 장년세례에 대해 급진적 개혁을 단행했고 평화주의를 성경신앙의 척도가 되게 했다.

물론 개혁은 종교운동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경제적 활동과 정치적 권력의 기초가 되었다. 개인의 위업과 자율성의 갱신된 의미가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게 했다. 하나님 창조의 경이에 대한 새로운 의미가 과학이 중세교회에 책임의 빛을 비출 때 사라져 버렸다.

피, 불 그리고 검 역시 갱신된 교회들을 제거하는데 사용되었다. 캐톨릭, 정교회 그리고 개신교의 모든 사람들 곧 중세의 대부분 신자들이 배워 즐기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의 더 분명한 비젼을 위하여 모든 순교자들에게 빚을 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