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라하여 좋은 일들만 있는것이 아니다. 책임감 문제는 여기서도 답답함으로 나타난다. 무엇을 하라는 지침을 주면 그대로 시행되어야하는데 이런 저런 변명과 핑계로 대응한다. 그때 변명은 거짓과 거의 통한다. 보고하라면 보고해야만 전체 흐름이 잘 굴러갈 터인데 그 일에 많은 펑크가 생겨 속상한 일이 한 두번이 아니다. 그때마다 나는 회개에 관한 진리를 생각한다. 회개는 언제나 책임감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참 회개한 사람은 책임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만일 이 책임감이 상실된 삶을 산다면 그는 자신의 회개를 점검해야만한다. 왜냐 그의 회개는 거짓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편의 강도를 보면 우리가 당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는 자기 탄식으로 시작하다가 “예수여 당신이 저 나라에 갈 때 나를 기억해 달라”고 요청하는 믿음으로 나아갔다. 강한 믿음이 생긴 것이다. 회개는 반드시 믿음으로 나타나야만 생명을 경험한다. 다시 말하면 회개란 책임을 지려는 강한 부담감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언약백성은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모시면서 동시에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리로 나가게 되어있다. 성령이 우리가운데 오셔서 그 일을 이 루시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맡은 일에 성실하려는 책임감으로 표현된다. 그렇다고 책임감이 무슨 공로가 되어 구원을 얻는데 보태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내리는 통로가 되는 것이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앞에 순종하는 책임감으로 표현된다. 그 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귀하게 여기고 진실된 그릇 위에 받으려는 태도의 중요성을 알고 수고와 노력이 들어감으로 은혜를 받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자발적인 자유의지는 하나님 앞에 적은 것 하나라도 책임지려는 진실의 마음으로 은혜다워진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받은 이후 정해진 표준에 이르기 위하여 참된 노력을 요구한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그리고 소망의 인내는 모두 책임감과 통하는 일이다. 책임이 결여된 마음에는 이런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다. 역사, 수고 그리고 인내는 그 바탕에 책임지려는 진실된 태도를 포함한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란 신분을 확신해야하고 동시에 모든 것을 다하여 그 신분에 걸맞는 자리로 나가려 해야한다. 강한 노력 강한 책임감을 요구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진실한 사람 곧 모든 일에 책임의 사람이다. 자기의 경건생활뿐 아니라 이웃의 구원까지 책임지고 가슴에 품고사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책임지는 사람이 적은 개인과 교회는 혼돈과 어두움이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
성령은 책임의 영이심으로 성령받은 사람은 책임을 느끼며 사는 사람이다. 말과 행동과 선택에 있어서 심판대 앞에 계산할 자임을 알고 진실되이 살아간다. 이 세대의 교회가 그렇게 어두운 것은 이 책임감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성경을 따라 살아가려는 개혁신앙은 바로 이 길을 걷는 자로서 장차 주 앞에 설 때 인정을 받으려는 강한 책임 위에서 살아가는 자들이다. 만일 이 책임감이 약해졌다면 이미 우리는 영적 큰 타락의 자락에 떨어져 있음을 인정해야한다. 개인이든 교회이든 우리 자신부터 하나님앞에서의 책임감을 느끼고 그것을 회복하려는 발걸음이 있을 때 소망은 시작되는 것이다. 참된 회개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인이라는 책임감으로 나타나 주님의 부스러기 은혜만이라도 좋아하는 진실된 사모심으로 나가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