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의지를 주님 의지 위에 세우라

의지(volition)란 인격의 삼 요소, 지성, 감성, 의지 중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기능이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의지를 가리킨다. 의지를 다른 말로 뜻(will)이라고 한다. 성경은 이 의지를 어디에 두느냐를 중요하게 다룬다. 이것은 그 사람의 향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겟세마네 동산 기도의 결론이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한 것은 자기 의지를 하나님 의지에 두는 결정이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의지는 우리 인생의 나침반이요 자동차의 핸들과 같다. 이 의지는 때로는 결심으로, 때로는 소원으로, 때로는 고집으로 나타난다. 이 의지의 기둥을 든든한데 세우는 자가 복되다. 그러나 약한 곳에, 변하는 곳에 세우는 자는 믿을 수가 없다.

다니엘의 위대한 점은 바로 자기 의지를 주님의 의지에 세웠다는데 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다. 이것이 그의 의지를 하나님 의지에 둔 모습이다. 그의 소원을 하나님의 소원에 둔 인생을 살 때 그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다. 어릴 때부터 다른 상황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정하는 생활은 정말 아름다웠다. 이런 의지를 세우려면 우리는 다음 몇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절대적 뜻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해야한다. 하나님의 의지는 성경에 표현되었다. 성경은 하나님 의지의 책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 지가 분명하게 기록되었다. 하나님의 소원으로 충만하다.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은 그의 의지를 가리킨다. 그것의 요약인 십계명과 사랑 계명은 하나님의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의지 위에 우리 의지를 세울 때 보장을 받는다. 절대 의지에 나의 약한 의지를 세우는 지혜자가 될 때 바로 분별하고 바로 살아 나갈 수 있다.

둘째, 유혹을 이겨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의지를 알고서도 자신의 의지 위에 하나님의 의지를 맞추려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소원을 이루려는 인간의 얄팍한 욕망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다니엘은 당한 환경이 어려운 처지로 자기 신앙의 절개를 꺽기 쉬운 환경에 있었다. 그럴 때 그는 무엇을 했는가? 다른 소년들이 쉽게 따르는 길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알고 거기에 자신을 드렸다. 이런 외적 환경의 유혹을 이김으로 자기 의지를 하나님 의지 위에 세웠다.

셋째, 그러기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하루에 세 번 기도한 다니엘처럼 쉬지 않고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 의지 위에 세우는 자이다. 그리고 말씀의 거울을 보아야 한다.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지를 발견하고 그 의지가 빛이요, 그 의지가 소망이요, 그 의지가 더 강한 것을 발견하고 나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기에 이르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는 세상에 흔들리지 않은 하나님의 절대 의지에 우리 자신의 뜻을 세워나가자.

삼상 26:9 성령의 길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삼상26:9)

[설명]

기름부음이란 성령을 가리킨다. 구약의 3직분 왕, 선지자, 대제사장에게만 부은 기름부음은 성령을 가리킨다. 성령의 능력으로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울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어도 그의 왕권은 하나님이 세우신 것을 알았다. 성령에 대한 경외심이다. 그만큼 성령의 인도에 예민했다는 것이다. 신약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소유한다.(요일2:27) 그래서 기름부음을 존중하는 다윗처럼 신자 하나 하나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 성령의 세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겸손히 따라 갈 때 죄를 벗어나 의를 이룰 수 있다. 하나님은 많은 사역보다 성령의 소리에 순종하는 마음을 더 원하신다.

이해할 수 없는 바울

바울은 다메섹 체험 이후 초대 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로 쓰임 받았다. 바리새인 중 바리새인이요, 율법학자요, 경건한 유대인이요, 헬라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는 삼층천 체험 및 많은 은사를 체험한 사람으로 신약의 절반 가량을 기록한 계시의 도구이다. 이만하면 얼마나 많은 것을 얼마나 재빠르게 응답을 받을만한가? 현대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일사천리요, 만사형통이요, 백전백승하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로마서를 읽다보면 바울의 이해할 수 없는 면모를 본다. 그것은 그의 기도 제목과 그의 사업이 너무나 인간적이라는데 있다는 점이다. 세계의 수도, 로마에서 복음 전하는 것이 그의 기도 제목이었다. 그러나 단번에 기도 응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 해 기도하면서 여러번 길이 막힌 경험을 했다. 믿사오니 하고 나갔더니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고 여러 해를 인내로 기다리고 기다렸다가 그것도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가는 것이다. 얼마나 인간적인가? 그 역시 당하는 고생이 많았다. 어려운 시험 틈바구니에서 고독과 난관과 싸우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었다. 우리도 주님 섬김에 기적, 능력, 희한한 일만을 추구하다가 낙심하지 말고 여러 고난 속에서도 인내함으로 주님 나라를 세우는 것을 더 좋아 해야 한다.

그는 로마 교인들에게 기도 부탁을 한다. 대사도 역시 성도의 도움이 필요한 약한 인간이다. 다메섹의 체험을 했다고 해서 자기 멋대로 나간 것이 아니다. 아라비아 3년의 연단, 예루살렘 교회의 원사도들에게 자기 교훈을 점검 받고 확인된 다음 나아갔다. 그리고 교회의 기도를 존중히 여기고 하찮아 보이는 일에도 기도를 부탁하였다. 그 기도 제목은 유대의 순종치 않는 자의 손에서의 구원과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김을 성도들이 받음직 하게 되기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는 것이 기도 제목이었다. 얼마나 실제적이요 얼마나 겸손하며 얼마나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엿보이는가? 오늘날처럼 큰 비죤, 적극적 사업, 큰 목표, 큰 열매, 세대를 주름잡는 교회 능력, 눈에 보이는 것에 치중하여 자만에 차있거나 없으면 한숨 쉬는 가치관과는 얼마나 대조를 이루는가? 그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없는 자처럼, 겸손히 주님의 방법으로, 주님의 주시는 힘으로만 하려했다.

물량주의, 기적주의, 그리고 기복주의의 그릇됨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으면 좋겠다. 바울의 인간적 섬김의 사역을 바라보고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어야한다. 성경의 밝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 교회의 모습을 바로 발견하고, 우리 모두 바울처럼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인간이 되자! 인간은 인간이지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적 깨우침이기 때문이다.

삼상 6:1-7:2

1. 블레셋 진영에 들어간 법궤는 여전히 일한다. 하나님 임재는 거기서도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권위를 높인다. 신자의 곤경 속에서도 주님은 손을 놓지 않으신다. 바벨론 포로 생활, 애굽의 포로 생활을 허락하심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열방에 증거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사모하게 하심에 있다. 고난은 조롱당함과 고통만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사모하게 하는 기도로의 초청이기 때문이다.

2. 인간의 고안된 우상은 무력하다. 인간은 자기의 난관을 주목하고 온갖 수단으로 막으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위에서 일하신다.

3. 구원받은 우리의 할 일은 성령의 검을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 가장 복되다.
(2008.05.26)

소망의 하나님

미얀마에 사이클론의 재난에 이어 금주에는 중국에 진시황의 왕릉 관광지로 유명한 쓰촨성(四川省)에 진도 7.8도의 강진으로 4만여명이 죽고 실종된 사태가 일어나 세상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진정한 소망이 어디 있는가를 찾게됩니다. 로마서 5장 8절-13절에 바울은 하나님을 소망으로 삼았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의 소망은 한마디로 완성된 구원이었습니다. 구원 혹은 구속을 빼 놓은 소망이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소망, 비죤을 꿈꾸고 나간다 할지라도 죄에서의 구원이 없는 소망은 참 소망이 아닙니다. 그 마지막은 허무이기 때문입니다. 밭의 소출이 풍성하여 창고를 짓고 영원토록 즐기리라는 한 부자의 터지는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먼저 보내 열방에 흩어진 택한 자를 구원하는 경륜(계획)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경륜이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안에 있는 자는 아브라함의 복의 근원이 되어 하나님만을 소망으로 삼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소망을 이룹니다. 구속 역사가 모두 마치는 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은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골자입니다.

또 바울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는 소망을 가졌습니다. 이 중요한 소망을 이루려고 성부는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는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안에 끊임없이 일하십니다. 영원토록 떠나지 않으시고 능력으로 일하십니다. 때로는 보슬비처럼, 때로는 불처럼 일하십니다. 이 사역으로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현실화됩니다. 제일 큰 문제는 언제나 우리 자신입니다. 자신 속에는 언제나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정욕과 부패성이 돌덩이처럼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때로는 보이게, 때로는 보호색을 띄고 나타납니다.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다른 왕국을 꿈꿉니다. 경건을 이용하며 직분을 이용하여 소망 아닌 소망의 신기루를 따르는 것처럼 됩니다.

그러나 택한 자의 마음에 계신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심으로 참 소망의 길을 걷도록 능력으로 도와주십니다. 성령을 좇아 갈 때만 우리는 참 소망과 참 비죤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소망을 가진 자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감격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산 소망입니다. 영원히 남는 소망입니다. 그래서 일시적 기쁨이 아닌 영원한 기쁨을 맛봅니다. 이것이 영생의 체험이며 이것이 성령 충만의 맛입니다. 이 땅에서 먹고 마시는 것에 소망과 기대를 거는 자가 아니고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무엇인가를 아는 자입니다. 이런 소망을 아는 자에게는 찬송이 흘러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바울처럼 이런 산 소망을 갖고 성경에서 샘을 파며 기도 속에서 소망을 꿈구며 성령의 인도가 무엇인지를 배우기 바랍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때야말로 우리으 소망이 더 선명해지는 순간입니다. 소망의 하나님은 어떤 위기 속에서도 우리를 잘 인도하실 것입니다. 정해 놓으신 영원한 목적지를 향해 반드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가진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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