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블래포드 (1510-1555)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그는 자기 생명을 잃었다.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는 거짓말한 사람으로 정죄되어다. 겸손하면서 간혹 소심한 사람인 이 순교자는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많이 인용되지만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16세기는 영국사에 가장 종교적으로 위험한 때였다. 생존을 위해서는 군주의 변덕에 의존하면서 카멜레온 처럼 색깔 변화를 요구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의해 사로잡혀 어떤 희생을 치르면서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감행해야만 했다. 존 블레포드를 위해 그 희생은 정부의 약정된 지위와 마침내 그의 생명을 드려야만 햇다.

블래포드는 한 부자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이 비지네스와 법의 훈련을 받았다. 그의 기술은 유명한 헨리 8세의 정부를 섬기도록 부름받았다. 남자 상속자를 위한 헨리의 요청은 로마 캐톨릭과 결별하게 되었고 아들을 낳지 못하는 아내들을 죽이거나 추방시키게 했다.

런던의 한 법학도로 있던 블래포드는 그리스도를 믿었고 곧 캠브리지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려고 갔었다. 왕 에드워드 6세의 짧은 통치기간 1550년에 교목으로 안수를 받았다. 한번은 블래포드가 교수형을 당하는 죄수들을 돌보고 있을 때 “나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간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그 자신의 최종적인 죽음의 때를 예견한 것처럼 보인다.

1553년 에드워드는 죽었고 메리 왕정이 들어섰다. 피흘리는 메리로 알려진 그는 영국을 캐톨릭 교회로 돌이키려는 수고로 300명 이상의 순교자들을 내었다. 어떤 설교자 혹은 고위 성직자는 돌아갔고 많은 사람이 타협했다. 그러나 블래포드는 메리가 그에게 이교파간 영웅 약조를 체결했다.

메리의 등극 원년 어느 더운 8월의 일요일 그녀의 충성스런 배스 감독은 최근의 몰락하는 왕에 대해 비판하는 설교를 했다. 군중은 분노하며 위협적이었다. 한 청중이 감독에게 칼을 던졌으나 맞았지만 상처는 입지 못했다. 그 때 블래포드가 나타나 군중은 조용하였고 그들에게 질서를 촉구했다. 자신의 위협 속에서도 공포에 질린 감독을 보호하며 피신시켰다. 3일 후 블래포드는 난동으로 체포되었다.

2년 동안 블래포드는 습한 영국 감옥에서 설교하며 글을 쓰며 살았다. 그의 말이 너무 신실했기 때문에 간수들이 밤에는 그를 석방하여 날이 밝기 전까지 돌아오도록 허락했다. 그는 항상 그렇게 했다. 마침내 허물을 찾기로 결정한 교회재판정에 의해 조사하기 위해 취조관은 여왕의 선처를 받아드릴 여부를 물었다. 블래포드는 대답하기를 “나는 생명이신 은혜의 주님께 대한 나의 의무와 일치한 호의에 대해서는 왕의 호의를 기뻐하지만 주님을 불쾌하게 하는 일은 어떤 고통의 죽음보다 더 나쁩니다.”고 말했다.

당대의 그 위대한 설교자는 1555.7.1 화형장으로 끌려갔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그를 둘러싼 군인들에게 그 동안 그릇된 행동에 대해 용서해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가까이 있는 막대기를 주워 입을 맞추었다. 그는 한 젊은 죄수와 함께 화형대에 묶여서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형제여 위로가 있을 지어다. 오늘밤 주님과 함께 즐거운 만찬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네, 거기서 우리의 모든 고통이 평화로 바꿔지고 우리의 싸움이 기쁨의 노래로 변할 것이네.”라는 확신 찬 말을 했다고 한다.

삼상19:8-24

1. 악신을 부리시는 하나님(9)- 그는 악을 만드시지 않으신다. 모든 악을 이용하여 자신의 의를 이루시는 주권자이시다. 천국의 상급 하나에서부터 지옥 유황불 강도까지 다 주관하시는 왕이시다. 그러나 악인도 심판 날을 위해 예비한 것처럼 악령도 일시적으로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하루 빨리 그 분 앞에 순종함이 지혜이며 형통이다.

2. 사울은 온전히 쓰임 받지 못하고 일시적 감동을 받은 불쌍한 사람이 되었다. 처음에 그렇게 겸손한 자가 기회를 잃고 버림받은 것은 여호와 경외 신앙을 버렸기 때문이다. 사울처럼 되기를 원치 않는다. 다윗처럼 고난의 연단을 통해서라도 하나님께 영원히 쓰임받기를 소원한다.

3. 성도는 원수가 보기만해도 성령의 감동에 굴복하는 영권으로 충만해야한다. 나를 보는 자에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20절)

큰 야고보 (주후 44년)

체포, 체형 그리고 위협이 보편화되었다. 신자 그룹은 헤롯의 감옥에 잡혀갔다. 그들 중엔 사도인 야고보도 포함되었다. 그 사건은 예수의 제자들을 괴롭히기 위해 보통 유대 지도자의 주장으로 로마 지도자들이 수행한 것으로 골치 거리였다. 그러나 갑자기 야고보를 재판 없이 끌어내어 칼고 죽이는 일이 일어났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충격이 되었고 박해자들의 기세는 드높아갔다(행 12:1-1).

야고보의 복음이 헤롯 편의 정치적 실험 대상이 된 것이다. 전영병에 감염되듯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관해 법정 말다툼이 생겨 골치 아픈 일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극도의 비난을 일으키는 것 외에 어떤 그릇된 일을 행치 못했다. 그러나 구 정치가들이 그의 정치적 집단 중에서 야고보의 죽음에 대한 예민한 반응을 보이자 헤롯은 크리스챤 몇 사람을 제거하는 결정을 했다. 베드로를 죽이려는 그의 계획이 실패하자. 더 나은 계획을 세우기 전 그 나라에 또 다른 위기로 혼란을 맞았다. 얼마 안 있어 헤롯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아 충이 먹어 죽임을 당했다(행 1:23).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최초의 사도적 순교자가 되는 영예를 차지했다. 그의 죽음은 예수의 부활 승천 후 14년 이내에 생겼다. 단지 스데반만이 유명한 초기 순교자들 가운데 야고보를 앞 설뿐이다. 스데반의 죽음과 사울의 박해 때문에 개인적으로 안전 지역을 다니는 일들이 사도들에게 일어났음이 틀림없다. 결국 주님이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는 대위임령의 약속은 보존이 아니고 임재인 것이다.

이상하게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은 그들 모친이 예수님께 특별한 자리를 구했을 때 예수님에 의해 기억되었다. 예수님은 “네가 내 잔을 마실 수 있느냐?(마 20:22)”고 물으셨다. 그들은 “우리가 할 수 있나이다”고 즉시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아무 대답이 없으셨지만 다른 열 제자들은 자기들 보다 더 나은 특권을 얻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정말 나의 잔을 마시리라(마 20:23)”고 응답하셨다. 그이 말씀은 예언이었다. 야고보는 먼저 죽었고 요한은 마지막까지 살았다. 그들의 죽음은 사도의 순교 이야기 속에 기록되었다.

예수님이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제자들과 특별한 시간을 함께 보내실 때 우리는 야고보에 관한 최소한 정보를 얻는다. 그의 형제 요한은 복음서에 그 일 때문에 야고보를 언급하진 않았다. 단지 다른 제자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작은)와 구분시키기 위하여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큰)로만 불렀을 뿐이다.

역사적 문맥에서 14년은 큰 공백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3년 사역만이 3년을 충실히 커버한다. 그러면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야고보와 다른 사도들이 헤롯의 칼에 야고보가 죽기전, 14년간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문이 생긴다. 예수 승천 후 그 기간은 예루살렘에 있는 급증한 신자들과 그리스도의 주장을 거절하고 그를 죽인 유대 지도자들과 평정을 유지하려던 로마 권력자들 사이에 불편한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가끔 위협과 고문으로 질서를 유지했다. 사도행전의 처음 몇 장들은 신자 박해의 밀물의 흐흠으로 빛난다. 그러나 누가는 사울의 스승인 랍비 가말리엘을 포함한 중요한 순간들을 기록한다. 그는 신자 박해를 반대하지 않고 크리스챤을 죽이려는 자기 산헤드린 제자들에게 주의 환기시켰다. 그는 순교의 능력을 이해했다. 가말리엘은 말하기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행 5:38-39)고 했다. 관대한 조치를 받은 예루살렘만은 신자들이 보호를 받았지만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하는 과정을 느리게 했었다. 스데반과 야고보의 죽음은 결국 그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몰락은 교회를 바람처럼 흩어 놓았다.)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 그들은 손에 무엇을 얻은 특별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신자를 감옥에 넣는 일은 예루살렘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 사울이 갑자기 크리스챤을 체포하는 일을 계속하자 많은 사람이 안전을 위해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었다. 이것은 복음 전파의 유익을 가져왔고 사울 생애에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이다. 역시 그는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사울(바울)은 산헤드린의 박해 책임자로서 임명되었을 때 예루살렘의 상황은 수년 동안 고착상태가 되어있었다.

옛 스페인 교회는 야고보 시신의 유골을 보존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야고보가 예루살렘에서 그가 죽기 전 스페인 선교 여행에 수년간 예루살렘을 떠나있는 증거를 보여준다. 누가는 야고보가 외지로 나갔다는 언급에 관한 무엇을 사도행전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땅 끝인 지중해 끝보다 더 먼 곳의 긴 여행 동안 어부 출신 사도로서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수행했다는 사실은 개척자적 선교 사명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다니엘의 하나님 나라의 예언

느브갓네살의 꿈에 대한 다니엘의 해석은 이러하였다.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단 3:44)

이 예언은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구약 시대지만 분명한 말로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이 어떠함을 말해준다. 그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첫째, 하나님이 친히 세우시는 나라이다. ‘손으로 하지 않은 뜬 돌’, ‘산에서 나온 돌’이라 했다. 인간이 세우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능력으로 친히 세우시는 나라를 가리킨다. 둘째, 영원한 나라이다. 하나님이 세우는 나라이기에 하나님이 영원하신 것처럼 그 나라는 영원하다. 그 나라는 계시록의 무궁 세계로 완성되는 나라이다. 셋째, 그 나라는 다른 모든 나라를 멸하는 나라이다. 이것은 그 나라가 이 땅을 정복할 것을 보인다. 온 세상의 모든 나라는 그리스도에게 굴복하든지 아니면 망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한다. 철장을 휘두르는 권세로 그 나라는 이 땅의 모든 나라를 대적하여 서는 나라이다(시편 2장). 이것은 이 세상 나라는 죄로 인하여 어두워 하나님에게 속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하나님 나라를 다니엘은 예언하였다. 그 나라는 역사상에 일어나는 나라이고 그 나라는 마침내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이다.

주 예수님의 오심으로 그 나라는 이 땅에서 구체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다. 그 나라의 왕이신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 땅에서 시작되었다. 그리스도가 마귀를 성령으로 좇아내셨다. 이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미 온 증거였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 땅에 임했다. 우리는 그 나라가 다시 오도록 구하기 전, 이미 온 그 나라의 전진을 볼 수 있어야한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그 보화를 사는 자가 되고 나의 전 소유로 아낌없이 값진 진주를 사는 자로 살게 된다.

동시에 우리는 “그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를 드린다. 이미 온 그 나라는 그리스도 재림 때까지 미완성된 모습으로 이 땅에 전진한다. 이런 두 사이에 긴장(tension) 속에 살아가는 것이 교회이다. 이미 임한 나라의 의와 평안과 기쁨을 맛보면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 나라의 공의와 사랑을 바라보면서 현실의 주어진 위치에서 그 나라를 세워가는데 쓰임받는 자로 자신을 드리는 자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우리 교회는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해 부름받은 교회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나 개인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감으로 되는 것이다. 그 나라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되어야 하고, 그 나라의 평안이 우리의 평안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내 속에 이런 나라의 속성을 찾아 보아야 한다. 그 나라를 이루는 자로서 사는 자로 부름 받았기 때문이다. 외형적 모습을 이루는 것도 힘들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은 이것을 초월한 실제적 일인 것이다. 다니엘의 예언이 의미하는 바는 지금도 그대로 그리스도인인 내 안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삼상 17:1-11

1. 블레셋은 세상, 골리앗은 마귀, 이스라엘 군대는 교회(창 12:3)이다. 골리앗의 완전무장처럼 우리 앞에 질고, 재난, 음행법, 불황이 위협해도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의 투구, 의의 흉배, 진리의 허리띠, 복음의 신발, 믿음의 방패, 성령의 검, 그리고 기도로 무장할 때 나는 반드시 이긴다. 모든 문제의 산을 예수 이름으로 명하여 바다에 옮겨야겠다.

2. 사울의 두려움은 하나님을 의지 않고 자기의 힘을 의지한 증거이다. 영적 담력은 오직 그리스도를 신뢰할 때만 이루어진다.
(2008.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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